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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MB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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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정없이 쏟아지는 ‘콜드 콜’, 다양한 피부색의 학생 90여 명의 충혈된 눈초리, 교과서 없이 기업 사례로만 격론을 벌이는 수업 내용,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날 시켜 달라’ 솟구치는 손 손 손….

올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 활약한 한 산업자원부 관료는 수년 전 미국 유학 시절 겪은, 혼 빼놓은 강의실 분위기를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최고의 ‘경영자 사관학교’라는 하버드대학 MBA 과정이었다.

‘콜드 콜(Cold call)’은 미 동부 아이비 리그 명문 MBA 재학생들 간에 공포의 단어로 통한다. 콜센터나 세일즈맨의 예고 없는 전화·방문을 뜻하는 마케팅 용어였던 것이, 수업 도중 교수가 싸늘한 어투로 툭툭 던지는 난해한 질문을 가리키는 은어가 됐다. 어떤 고약한 질문이 내게 총부리를 들이댈까 강의실은 늘 불안한 전쟁터 분위기다. 학생들은 글로벌 비즈니스 전사(戰士)로 거듭나려고 2년간 500여 가지 경영 사례와 밤새우며 씨름한다.

서울대 등 일부 대학이 정부 지원을 받아 ‘한국형 MBA’의 고동을 울린 지 2년이 됐다.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국산 MBA’의 업무 능력이 어떨지, 취업은 해외파보다 잘 될는지 관심이 쏠린다. 더 나은 직장과 수입을 꿈꾸며 MBA 고생을 큰돈 들여 했지만 이들 모두가 활짝 웃을 순 없다. MBA 자격증은 유행과 경기변동에 민감해 금값이 되기도, 고등 실업자의 낙인이 되기도 한다. ‘묻지마 MBA’ ‘사이비 MBA’ 난립에 따른 ‘자격증 품질’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MBA가 일반 경영학 석사와 다른 건 실용학문을 비빔밥처럼 버무린 ‘통섭(統攝)’이자, 의사결정 능력을 계발하는 케이스 스터디의 장이라는 점이다. 자국의 크고 강한 기업들을 살아 있는 교재로 활용한 미국과 유럽이 19세기 후반 이후 MBA의 강국으로 자리 잡은 연유다. 토종 MBA의 성패 역시 삼성·현대·LG처럼 공부 재료가 될 대기업이 얼마나 더 많이 나오느냐에 달렸다. BK21 정부 평가나 예산 지원, 외국인 교수·학생 수에 연연해서는 곤란하다. 파란 눈의 백인 학생들이 ‘한국형 대형 마트의 해외 진출 전략’ 같은 ‘콜드 콜’을 받고 쩔쩔매는 모습, 그런 강의실 풍경이 돼야 한국형 MBA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경영학의 역사가 우리보다 짧은 중국 상하이 MBA 과정에 구미의 비즈니스맨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곽수근 서울대 경영대학장)는 경고가 예사롭지 않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