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2000>5.유리 중세거치며 기술 꽃피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만약 지구가 불로 멸망하고 식으면 땅은 모두 청록색의 유리로 덮일 것이다』(독일 뮌헨지역에 보존된 중세유리공장 벽면에 씌어진 글).
다소 상징적이기는 하지만,「재료의 여왕」으로서,「재료의 왕」인 철(鐵)과 더불어 인류문명의 견인차가 돼온 유리생성의 이치를 잘 표현한 글이다.
유리는 모래의 주성분인 규사가 탄산소다.탄산석회 등과 섞여 고온으로 가열될 경우 녹아서 생성된다.
이 때문에 인류의 손을 거치기 이전인 화산활동시기때부터 모래등이 녹아 흑요석.진주암 등과 같은 천연유리들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아폴로11호가 가져온 달암석중에서도 직경2㎜의 유리알갱이가 발견된 바 있다.
가장 오래된 유리제조기록은 기원전1세기 로마시대때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에 나타난『소다를 무역하는 페니키아 상인들이모래밭에서 소다덩어리에 솥을 걸고 불을 피웠더니 모래가 녹았다가 굳으면서 투명한 물체가 만들어졌다』라는 문구 다.하지만 고고학적 발굴결과 유리는 이미 기원전 4천년께부터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제조흔적이 나타났고 이후에도 유리구슬.술잔.향유병 등이 잇따라 발견된 것으로 볼때 제조역사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의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의 유리문명은 로마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됐고,이후 중세를 거치면서「불대」(녹은 유리덩어리를 병이나 컵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입으로 부는 쇠파이프)이용방법의개발,무색투명한 창유리.고딕식교회 건물의 모자이 크 창문.유리거울 등이 잇따라 개발됐다.
특히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찬란한 유리문화를 꽃 피웠는데,이탈리아는 무라노라는 섬에 유리기능공들을 사실상 감금시켜 놓고 발전된 유리제조기술을 독점했다.
하지만 이중 베르넬리니라는 기능공이 영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유럽전역에 유리제조기술이 전파되면서 1676년에는 영국의 유리제조공 라벤스크라프트가 유리의 꽃으로 불리는「크리스털 유리」를 개발해 내기에 이르렀다.크리스털유리는 녹은 유 리에 산화납을 섞어 만드는데 납성분 때문에 빛의 굴절률이 높아져 광채가 나고 가공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까지 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5~3세기)고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이 최고(最古)여서 시기적으로 서양에 뒤지고,당시 사용된 벽유리(壁琉璃)라는 명칭이 산스크리트어의「Vaidurya」에서 유래됐다는 기록으로 보아,유리제조기술 만큼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유리와 관련,재미있는 사실은 유리가 고체도 액체도 아닌 무정형 물질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액체는 온도가 내려가면 특정한 온도(어는점)에서분자결합이 단단해지면서 결정화 상태,즉 고체가 되는데 유리는 온도가 내려가도 어는점이 생기지 않고 그저 느슨한 상태의 내부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성(액체상태에서 끈적 끈적한 정도)이 높아져 굳을 뿐이다.
두산기술원 명남진(明南鎭.화공)박사는『육안상으로는 고체가 분명하지만 이같은 성질 때문에 물성론적으로 유리를 점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액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유리는 그 성분에 따라 규산염유리.붕규산염유리.인산염유리 등으로 나뉘는데 규산염유리가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유리다.
우리나라는 낙랑시대 고분에서 유리구슬.귀걸이 등이 출토 됐으나 중국수입품일 가능성이 높고 백제의 유리장신구,신라 금관총의유리잔등이 출토된 삼국시대가 본격적인 유리제조의 시작으로 보인다.그러나 유리는 고려.조선시대의 도자기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02년 이용익이 러시아 기술자의 협력으로 국립유리제조소를 설립하면서 다시 그모습을 나타냈다.
유리창은 이보다 앞선 1873년 일본공사관(현재 종로 수운회관앞)건물의 유리창이 처음이었으며,구한말 일본인들이 충무로의 상권을 쉽게 장악하고 종로의 조선인상권까지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에서 들여와 상점앞에 설치한 유리진열장의 인기때문이었다. 이후 1909년 서대문유리공장,1913년 경성초자제조소등24개의 유리공장이 차례로 문을 열어 병유리와 「남폿불」의 유리램프인 「호야」등을 생산했다.해방과 6.25이후에는 일제(日帝)가 남긴 제2경성초자제조소(맥주용 병유리생산)를 인수한 동양유리가 57년 순수국산1호인 해남초자주식회사(두산유리)를 설립하면서 병유리산업을 시작했다.
판유리는 운크라(유엔한국재건기구)가 전후복구사업으로 57년 건립한 인천의 판유리공장을 당시 재력가였던 최태섭(崔泰涉.한국유리창업주)씨등 6명이 불하받아 「대한유리공업기성회」로 출발했는데 崔씨는 당시 첫생산된 제품을 경무대로 보내기 도 했다.
현재 국내 유리생산원료는 주로 안면도 채취모래를 사용하는데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국내모래는 철성분이 많아 그리 좋은 편이 못되고,완전 무색유리(일반유리는 철성분 때문에 초록색기를띰)를 만들경우에는 주로 호주의 모래를 수입해서 제조하고 있다. 〈李孝浚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