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한석봉 엄마' 시리즈에 공감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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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주부 J씨가 “요즘 부모들은 진정한 자식사랑이 뭔지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는 탄식과 함께 들려준 얘기다. J씨의 딸은 경기 지역 한 외국어고의 입시를 치렀다. 시험을 본 날 저녁, 해당 외고 홈페이지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도배가 됐단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듣기에서 독해 수준의 긴 지문이 딸린 문제가 출제됐다는 것. “입시설명회 때는 이렇게 나온다는 얘기가 없었다”는 게 항의의 주된 이유였다. 다른 하나는 ‘창의력·사고’ 문제에서 모 학원의 문제집에 있던 문항 2개와 비슷한 유형이 나왔다는 것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속상해 하는 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할 부모들이 ‘재시험을 치르라’라든가, ‘고소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건 좀 심하다 싶더군요. 문제 20개 중 2개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부모가 ‘학원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부터 한다면, 아이가 학교에 대해 불신을 갖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네가 정말 실력을 갖췄다면 문제가 어떤 형식으로 나오든 상관 없다’고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자식 사랑과 부모 노릇. 둘 다 요즘 같은 교육 광풍의 틈바구니에서 여간 심지 곧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해내기 힘든 덕목이 아닐까 싶다. 아니, 무엇이 제대로 된 자식사랑과 부모 노릇인지조차 헷갈리는 아노미적인 현실이다. 도저히 부모가 쿨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서 쿨한 학부모로 산다는 건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내 아이가 손해 봤다’는 비상등이 깜빡일 때, J씨가 들려준 사례처럼 부모의 마음은 상식과 교양의 궤도를 한없이 이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을 핑계 대며, 자식사랑을 내세우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극성부모가 되는 건 손쉽지만 비겁한 일이다. 유명한 과외학원을 물색하기에 앞서, 수험생 머리 총명해지게 한다는 보약 짓기에 앞서 나는 어떤 부모인가, 나의 자식사랑은 어떤 빛깔을 띠었는가 돌아볼 일이다.

그런 바람에서,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유머 중 ‘한석봉과 어머니’ 시리즈를 몇 가지 소개한다. ①배고픈 어머니. 한석봉: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어머니:자, 그렇다면 난 떡을 썰 테니 넌 물을 올려라. ②피곤한 어머니. 한석봉: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어머니:자, 그렇다면 어서 불을 끄거라/한석봉:글을 써 보일까요?/어머니:글은 무슨… 잠이나 자자. ③무관심한 어머니. 한석봉: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어머니:너 언제 나갔었냐?

지금의 과열된 상황이라면 당대의 명필로 키워야 할 아들에게 배고프니 물을 끓이라든가, 고단하니 잠이나 자자는 어머니가 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 “네가 언제 나가긴 했었냐”는 무관심한 어머니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썰렁한 유머에 엄마들이 공감하는 이유도 아마 그런 시대로부터 오는 갈증 때문이 아닐까.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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