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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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통수의 죽음과 건영의 옥살이는 내게 어떤 변화를 요구했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얼마동안은 학교나 집에서나 오히려 이상할만큼 내게 특별한 말이 없었다.아마도 우리가 건영이를 면회갔을 때 할 말이 없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이 죽어버린 일이나 그 때문에 잡혀간 친구를 갖지 못했을 거였다.그래서인지 누구든 그즈음의 내가 겪는 혼돈에 대해서 함부로 참견하려 들지 않았다.나는 나대로 내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남 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다.
어쩐 일인지 악동들끼리도 서로 내놓고 어울리지 않았고,나는 건영이에게 엽서를 쓸 때에만 진심의 일부를 꺼내보이곤 할 뿐이었다. 가령 이렇게 쓰고는 하였다.
「산다는 건 어차피 철저하게 각자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어.그걸 인정해야 하는 건 아주 슬픈 일이지.그래서 난 언젠가 예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유혹을 느껴.」 그즈음에내게 가장 힘이 되어 준 건 왕박이었다.다른 사람들이 다 갑자기 나를 어려워할 때 왕박은 내가 여전히 그냥 멍달수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왕박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는가 하면, 자기가 나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조차 내게 내색하지 않고 무관심한 척하였다.
나는 집이나 학교가 다 불편했으므로 시간이 나는대로 독서실에박혀 있고는 했는데,그즈음에 왕박이 설명해준 영어의 관계대명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나는 두 문장을 하나로 만드는 데에 재미를 붙여서 성문 종 합영어를 붙들고 있고는 하였다.
독서실이 있는 동교동에서 양화대교까지 하영이와 걸어갔다가 온건 시월의 첫주쯤이었다.누가 찾아왔다고 해서 나가보니까 하영이였다.공부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니 라고 해서,내가 공부는 무슨… 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냥 골목길로 해서 걷기 시작했는데 가다보니까 양화대교 부근의 강가였다.별 말도 나누지 않고 타박타박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아주 묘한 일이었다.강가에 나란히 주저앉았을 때,나는 우리가 마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길 을 걸어온 것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니가… 힘들어하고 있을 거라구 생각했어.』하영이가 말했다.
강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냐.난 요즘에 왕박하고 열심히 공부했다구.영어에 관계대명사라는거 있잖아.그거 아주 재미있던데.난 그냥….』 나는 갑자기 울음이 북받치는 걸 참아내야 했다.성식이나 건영이나 통수 때문도 아니었고,가을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써니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고,악동들이나 가족들이나 학교 때문에 그런 것도아니었고,그저 내가 치르고 있는 세월 이 내게 저 강처럼 무심하게 여겨져서도 아니었고… 어쩌면 또 그것들 모두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영이는 내가 울고 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걸 알면서도 창피해하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강바람은 서늘했는데,하영이가 내 손을 잡아줬을 때는 아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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