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정승화측서 군부반란-全前대통령 주장 12.12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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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은 15일 12.12 사태에 대한 검찰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보냈다.다음은 全씨측이 밝힌 12.12 사태의 전말을 요약한 것이다.
▲정승화(鄭昇和)연행 결정 경위=이학봉 수사1국장은 김재규 내란 사건에 정승화참모총장이 연계돼 있다는 점이 드러남에 따라10월27일 全본부장에게 연행 조사의 필요성을 보고.그러나 全본부장은 정국 안정이 필요했으므로 극비리에 내사 를 진행토록 지시. 정승화가 이재전경호실차장에 대해 군 검찰에 불기소처분을내리도록 압력을 행사하는등 親김재규적인 언행을 계속하자 全본부장은 12월초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최종결심.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의 재가=全본부장은 12월12일 오후 6시30분 이학봉국장을 대동하고 대통령 공관으로 올라가 정승화연행 조사에 대한 재가를 요청.崔대통령은 노재현장관을 배석시켜재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노장관을 수배토 록 지시.그러나노장관은 7시20분쯤 정총장 연행과정에서의 총소리를 듣고 부인.아들과 함께 단국대학으로 피신해 연락이 닿지 않음.
그동안 30경비단장실에 있던 유학성.차규헌.황영시.백운택.박희도등 5명의 장성이 밤9시30분 공관으로 최대통령을 방문,대통령 전권으로 사안의 처리를 건의.
밤10시10분쯤 노장관은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곧 출두하겠다고밝힘.그러나 노장관은 13일 새벽4시30분까지도 출두하지 않았다. 노장관은 이때 국방부에서 김용휴차관등과 사태수습을 논의하다 1공수와 수경사간에 총격전이 벌어지자 1층 계단으로 은신한뒤 13일 새벽 3시50분쯤 수색병력에 발견되고 나서야 청와대에 들어갈 결심.노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가 본부장의 건의대로 재가해주도록 건의하자 대통령은 즉석에서 서명.대통령 재가시 전본부장이나 30단 회동 장성은 단 한사람도 배석하지 않았다.
▲정승화 연행 경위=이학봉국장은 우경윤수사2국장.허삼수 조정통제국장등 7명으로 연행조를 구성.
이국장은 전례로 보아 대통령이 즉시 재가해줄 것으로 보고 사건보고 30분뒤 연행조가 총장 공관에 도착하도록 조치.
우국장 등은 7시 조금 지나 공관에 도착.정총장은 대뜸『너희들 어디서 왔어』라고 고함.정총장이 부관과 경호원을 부르자 6~7명의 경호원이 몰려왔다.
이들이 우국장 등을 체포하려 하자 우국장은 공무집행중이라고 하면서 문밖으로 나갔다가 2층계단에 있던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짐.갑작스런 총소리에 총장 경호원들은 모두 도망갔고 방안에는 정총장과 허국장만 남게 됐다.
허국장은 정총장에게 합수부로 갈 것을 권유했고 정총장도 이에동의해 응접실 밖으로 나감.이때 젊은 청년 하나가 권총을 겨누고 서 있어 허국장이 쏘지 말라고 고함을 침.청년은 박원철수사관이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오자 도망감.허국장은 바로 정총장을 승용차에 태워 연행.
▲정승화계열의 군부반란 행위=육본에 정승화 연행소식이 알려진것은 오후7시40분.정승화총장의 부인으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은 윤성민 육참차장은 8시10분 수도권 일원에 진돗개하나를 발령.
총장납치차량 찾도록 명령.
장태완 수경사령관 전병력 사령부에 집결명령.청와대 외곽경비 담당하는 33경비단병력 지휘권은 대통령 경호실장이 갖고 있음에비춰 월권적 불법임.張은 30경비단에 모여있는 유학성군수차관보와 황영시1군단장에게『이놈들 꼼짝말고 거기있어.
내가 포를 갖고 네놈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고 흥분했다.
張사령관은 배정도26사단장.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에게 전화를걸어 서울출동의 월권적이고 불법적인 명령을 내림.
노재현국방장관은 병력동원을 하지 말라고 張사령관과 육본참모진에게 명령함.이에 반발한 張사령관은 11시쯤 전장교를 상황실에집결시킴.
30,33경비단장.헌병단장,그리고 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도록 명령.
張사령관은 야포단의 모든 포를 경복궁을 조준토록 했는데 야포단장이『광화문일대가 쑥밭이 된다.민간인의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크다』고 명령의 부당성을 지적함.
정병주특전사령관은 張사령관의 지원독촉을 받고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병력 출동을 명령했고 12일 밤12시 9공수 서울로 출동개시.
▲30경비단 회동=全본부장은 유학성.차규헌.황영시.노태우.박준병.박희도.최세창.장기오등 8명의 장성을 수경사30경비단에 초청한 것은 鄭총장연행조치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군부내의 동요와 반발을 사전에 막고자하는 목적임.全본부장은 이 학봉 수사1국장에게 정승화 연행준비를 지시한 다음날인 7일 서울에 정기외박을 나온 노태우 9사단장이 합수부에 왔다.
盧사단장은 정승화의 조사를 통해 10.26내란사건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이에 全본부장은 盧사단장에게 합수부가 내사한 정승화의 혐의점을 설명하고 鄭의 수사방해와 노재현장관의 소극적 태도로 수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12일에 鄭을 연행조사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줬다(全본부장이 12일 이전에 정승화 연행조사방침을 알린 사람은 盧사단장 한명뿐임).그리고 수도권에 주요 지휘관들을 초청해 鄭의 혐의점을 알려 연행이불가피함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합수본부의 수습과 난국대응=보안사령부가 정승화 연행에 대한첩보를 입수한 것은 8시쯤이다.연행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정도영보안처장은 정승화연행의 배경을 예하지휘관에게 알리고 불법적인 병력출동은 하지 않도록 지휘조언을 하기로 결심했 다.
박희도1공수여단장은 9공수여단이 출동해 정총장 수사를 막으려는 것은 군통수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생각했다.이에 따라 13일 0시20분 4개대대병력을 이끌고 부대를 출발했다.
최세창3공수여단장은 정병주특전사령관의 9공수여단 출동명령이 군지휘부의 지시에 반하여 강행되는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반란행위이므로 반란행위의 현행범인을 체포해달라는 본부장의 요청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박종규5대대장에게 정사령관의 체포를 명령했다.박대대장이 체포조10명을 인솔하여 사령관실로 갔는데 사령관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총격을 가해왔다.수명의 체포조가 부상을 당했다. 부득이 응사하면서 들어가 체포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사령관은 부상했고 김오랑비서실장은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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