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 수사로 ‘수치스러운 흉터’ 남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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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10면

영화 39살인의 추억39의 한 장면. 화성 사건에는 과학수사의 수준뿐 아니라 1980년대 사회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중앙포토

●가상 시나리오 첨단 과학수사로 풀었다면
논두렁에서 시체가 발견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신속히 현장을 봉쇄하고 폴리스라인을 쳤다. 곧이어 도착한 과학수사요원(CSI)들은 현장 인근 땅바닥과 수풀 속을 훑기 시작했다. 사체 주변에는 차단막이 쳐지고 특수광 램프와 방사선 촬영기를 번갈아 비추자 혈흔과 체액, 모발과 섬유 조각,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지문과 금속·비금속 가루들이 마술처럼 드러났다.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과학수사

사체 발견 후 48시간 뒤, 연쇄범죄를 찾아내는 ‘연관성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10년간 수원과 화성·오산 등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발생한 11건의 미해결 여성 성폭행 피살사건들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범죄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중 6곳의 현장에서 채취된 체액 혹은 모발에서 추출한 DNA 샘플이 확보되었고, 5곳의 현장에서 발견된 섬유 조각은 모두 같은 성분과 색조를 가진 동일물질로 판명되었다. 7곳의 현장에서 채취된 미세한 금속물질은 알루미늄 강관 공장 커팅 과정에서나 묻어날 수 있는 크기와 상태였다. 12건의 사건 현장 중 단 한 군데, 논두렁 사체 가슴 부위에서 적외선 감지기에 촬영된 희미한 쪽지문은 첨단 화상개선 처리과정을 거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탐문수사에 지쳐가던 사건 1주일째, 과학수사실험실에서 “나왔어!”라는 함성이 터졌다. 특징점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 신원확인이 불가능해 보였던 쪽지문 주위에 특수광을 여러 각도로 쪼이며 촬영하고 확대하기를 반복한 끝에, 미세한 체액 흔적들이 형성한 나머지 지문 모양이 새벽 햇살처럼 드러난 것이다. 지문자동검색시스템을 통해 25세 ‘이진범’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금속공장에서 알루미늄 강관 커팅 작업을 하던 이진범은 출동한 형사대에 긴급체포됐다.

이진범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다 DNA와 지문이 현장 증거와 일치하고, 셋방에서 압수된 스웨터가 현장에서 수거된 섬유질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추궁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물론 ‘가상’이고 ‘희망사항’이다.

● 장비·시스템 도입 계기로
1986년부터 91년까지 화성지역에서 발생한 10건의 미해결 ‘부녀자 살인’ 사건을 묶어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고 부른다. 공소시효 15년이 지나 추가 범행이 확인되지 않으면 ‘내가 범인이오!’ 하고 나서도 처벌할 수 없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 과학수사 수준과 시스템에도 책임이 있다. 사건 현장 보존에서 증거 채취, 감정 및 분석에 이르기까지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제대로 된 과학수사 장비도 없었다. 이미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런 문제점들은 부각되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DNA 분석 장비가 도입되었고, 한직(閑職)으로 치부되던 경찰 감식업무가 ‘과학수사’라는 명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지금은 선진국 수준의 지문 현출, 혈흔 분석, 미세증거 채취 등 과학수사 시스템을 갖추어가고 있는 경찰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운 흉터’다.

그래도 당시에 과학수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도 꽤 있다. 범인은 현장에 정액, 혈액, 모발, 체모, 대변 혹은 타액을 남겼고, 분석 결과 혈액형이 B형이란 것이 밝혀졌다. 정액에서 추출된 DNA 샘플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보관 중이다. 용의자만 나타나면 진범 여부 확인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족적도 발견·수집되어 범인이 245㎜ 사이즈의 신발을 신는 ‘발이 매우 작은 남자’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범행수법과 피해자 사체에 남긴 가학행위 등 행동증거 역시 범인의 성격적 특성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바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지문 채취에 실패했고, 용의자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섬유 조각이나 금속·비금속 물질 등 ‘미세증거’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딱 2%가 부족한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총 11명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동안 용의자로 선정되어 정식 수사 대상이 되었던 사람만 2만 명이 넘는다.

특히 자백을 받으려던 일부 형사의 가혹행위 끝에 사망한 명모(당시 21세)씨와 밤샘취조 끝에 범행을 자백해 진범으로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다가 DNA가 일치하지 않아 석방된 윤모(당시 20세)씨는 ‘또 다른 연쇄살인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윤모씨 역시 몇 해 전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람이 지난 곳엔 흔적이 남는다
사람이 들른 곳에는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는다. 다만 그 흔적을 찾아내고 밝혀내는 과학과 기술에 한계가 있을 뿐이다.

우주 저편 화성과 명왕성의 비밀을 밝히는 과학과 기술을 범죄수사에 적용하기만 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범죄는 없을 것이다. 과학수사 분야에 대한 거국적 관심과 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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