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아빠의 직무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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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얼마전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니 아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일요일에 딸아이 담임선생님 가족과 함께『인어공주』를 보러가기로 약속을 해놓았으니 꼭 같이 가잔다.
약속한 날,내아이 예쁘게 봐달라는 너무 속보이는 짓인 것같아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연극을 보고 나서 근처의 제과점에 들어갔다.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딸아이 담임선생님 남편의 표정도 조금은 굳은 듯 했다.하지만아이들은 달랐다.국민학교 1학년인 선생님 아들녀석과 우리 딸아이는 저희들끼리 재잘거리고 잘 어울렸다.시간이 가면서 분위기는점점 자연스러워져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가 아니 라 마치 같은 학부모끼리 만난 것 같았다.
난생 처음(그래봐야 학부형 된지 2년밖에 안됐지만) 담임선생님을 직접 뵌 날 난 딸아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차분하고 꼼꼼한 아이로 알았는데 의외로 산만한 구석이 많다는것이다.내딴에는 딸아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 상한 아빠라고생각해 왔는데 웬 착각! 딸아이에게 미안했고 한편으로 아이들이볼만한 연극을 통해 자연스런 자리를 마련한 아내의 사려깊음이 고마웠다.
『거봐요.아이도 저렇게 좋아하잖아요.요즘 아빠들 이 핑계 저핑계대며 아이교육을 전부 엄마들에게 떠넘기는데 그런 점에서 심각한 배임죄와 직무유기죄를 범하고 있는 거라구요.』 옆에서 한마디 하는 아내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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