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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도 혀찬 '위원회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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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공화국'.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발상은 그런대로 참신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 후 설립한 '국가성과심의회(National Performance Review)'를 연상케 했다. 클린턴은 심의회에 여러 팀을 만들어 개혁 프로그램을 짜게 했다. 민간 전문가와 최정예 관료를 투입했다. 그 결과 심의회는 개혁에 소극적인 관료 조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초 노무현 당선자도 12대 국정과제를 정한 뒤 과제별로 팀을 짰다. 여기까지는 클린턴의 심의회와 비슷했다. 그러나 정부 출범 후 이 팀이 고스란히 대통령 산하 12개 위원회로 탈바꿈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업은 위원회는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가위 무소불위였다. 장관도 위원회에서는 일개 위원에 불과했다. 노 대통령 탄핵의 빌미가 된 새 수도 후보지 평가도 건설교통부나 행정자치부가 아니라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가 도맡았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관장한 곳도 '국가균형발전위원회'였다.

한술 더 떠 위원회는 외부 감시도 받지 않았다. 국회나 감사원도 손대지 못했다. 대부분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자문기구였기 때문이다. 힘은 막강한데 감시는 받지 않았으니 '씀씀이'가 헤퍼지는 건 당연했다. 위원회의 2002~2007년 예산은 연평균 39.4%씩 늘었다. 같은 기간 연평균 5% 늘어난 중앙정부 재정의 여덟 배다.

갖은 명목의 위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말 364개였던 위원회는 올 6월 말 현재 416개로 52개 늘었다. 2002년 말 106개였던 장.차관급 자리도 136개로 30개 늘었다. 박명재 행자부 장관조차 "위원회를 여럿 만들어 상위직을 크게 늘렸다"고 탄식했을 정도다.

클린턴의 심의회는 개혁 프로그램을 짜고 성과를 평가했을 뿐 집행은 행정부에 맡겼다. 견제와 균형을 이룬 셈이다. 반면 현 정부의 위원회는 '로드맵'은 물론 정책 집행까지 간섭했다. 누가 비판할라치면 대통령이 나서 "일만 잘하면 됐지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위원회를 두둔했다. 오죽하면 26일 국회 예산결산특위가 나서 위원회의 예산 낭비를 감사하도록 감사원에 청구하는데 야권은 물론 여권 의원들까지 거들고 나섰을까.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정경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