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장관 버리고 선거 캠프 간 한심한 공직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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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치범 환경부 장관이 갑자기 물러났다. 이 장관은 사퇴 이유로 “민주신당 대선 예비후보인 이해찬 전 총리를 돕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현직 장관이 대선 예비후보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사퇴한 것은 처음이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데 본인이 장관직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의 처신은 장관을 공직의 꽃으로 여기는 수많은 공직자를 허탈하게 만들었고, 그를 장관에 임명한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장관직에 대한 그의 얄팍한 인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는 “20여 년 이상 관계를 유지해 온 이 전 총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는데, 어려울 때 함께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했다. 개인적 의리를 공적 책무보다 더 중시했다는 얘기다. ‘환경부란 조직에 줄 부담은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장·차관이란 자리가 정무직이며 정치적 행위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자리”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대운하 공약에 대해 “상식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아직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당 후보를 공격하는 일은 삼갔어야 했다.

기왕 물러날 것이었다면 8·8 개각 때 사임하는 게 옳았다. 노 대통령은 이제 이 장관 한 사람 때문에 개각을 해야 한다. 더구나 경선 개입 의혹까지 받고 있다. 임기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대통령의 권력 누수 현상을 가속화하고, 또 임명권자를 난처한 지경에 빠뜨린 이 장관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청와대는 공식 논평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장관의 사임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현 정권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장관직과 청와대 수석·보좌관·비서관직을 대선 후보나 총선·지방선거 후보로 내세우기 위한 경력 관리용으로 남발한 것이 누구였던가. 손쉽게 고위 공직을 거머쥔 그들에게서 공직의 엄숙함과 책임 의식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무리였는지 모른다. 5년 내내 이런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이 불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