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5부] 봄 (1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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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림=김태헌]

그무렵 가난한 수재가 엄마 앞에 나타났단다. 그는 엄마가 알지 못하고, 정권이 금지하는 멋진 사상가들의 책을 모두 읽었고, 시를 쓰고 있었어. 그리고 멀리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지. 엄마는 그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그에게 매료됐다. 그는 외할아버지로 대변되는 모든 비겁한 질서를 무너뜨릴 이론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자신의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저런 걸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시민이었단다. 엄마는 그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멀리 있는 신학생이나 선생님이 아닌, 살아 움직이고 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젊은이를 사랑하기로 한 건 엄마 평생에서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단다.

나는 버스비조차 없는 그를 위해 책을 샀고, 차와 술을 샀다. 그리고 그에게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혁명! …이라니. 누가 이런 꿈꾸는 듯한 단어를 가르쳐 준 일이 있었던가. 스물의 엄마에게 그것은 생을 걸고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낭만의 극한, 정의의 결정체, 혹은 박해받는 진리의 표상이었어.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리고 숭배했다. 상상해 볼 수 있니? 가난도,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밤새워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스물의, 다리가 길었던 젊은이를.

대학을 졸업하던 해, 그는 고아처럼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가난했던 그의 형제들이 모두 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엄마는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싸워 그와 결혼하고 만다. 그때 엄마 나이 스물둘이었다.

우리는 단칸방에서 작은 장롱 하나와 숟가락 두 개를 놓고 소위 결혼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그때 엄마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랬던 것 같았다. 스물 몇 평 좋은 아파트에 살며 자기 차를 타고다니는 친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어. 우리에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터질 듯한 자부심이 있었다. 엄마는 출판사 등을 전전하며 번역거리를 구해다가 그것으로 생활비를 댔고, 그리고 그는 독재자와 싸우는 일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 결과가 그렇듯 네가 태어나던 무렵 감옥으로 가게 되지. 그때 감옥은 그런 젊은이들로 터질 지경이었으므로 그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단다. 엄마는 갓난아기였던 너와 씨름하며 날마다 노트에 소설을 썼어. 네 분유가 떨어질까봐 겁이 나는 날, 혼자 주저앉아 어린 너를 붙들고 울기도 했지. 가끔씩, 이게 정말 삶일까, 하는 의문도 스쳐지나갔어. 하지만 살아내야 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그것이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가 느낀 나만의 하늘과 나만의 바람을 표현해내고 싶었어. 그러다 보니 어느 날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었고 그 무렵, 6월항쟁으로 항복을 선언한 정권이 감옥 문을 열었지. 아빠는 그렇게 우리에게로 왔다.

엄마의 첫 소설은, 출판사의 상투적인 문구대로 ‘출간 즉시 화제작’이 되어 그 당시로서는 꽤 많이 팔려나가게 되었단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엄마는 바빠지기 시작했지. 미국에서 다니러 오신 네 친할머니가 우리의 작은 집에 함께 기거하시며 너를 돌보아주셨단다.

생각해보면, 혁명의 환상이 깨어지던 순간부터, 혁명보다 지독한 일상이 우리에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네 아빠와 나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아빠는 엄마에게 외출을 하지 말 것을 명령했어. 외할아버지에게 난생처음 뺨까지 맞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가난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 이유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었는데, 믿을 수가 없었지, 어떻게 진보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자기 부인의 일을 막을 수가 있을까. 위선자! 엄마는 소리쳤지. 아빠의 얼굴은 질려갔고 시선은 엄마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단다.

위녕, 엄마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몹시 힘이 드는구나. 여태껏 엄마는 그가 가부장적인 사고로 엄마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울부짖음에 아빠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스물 몇 살 아직도 젊었던 우리 부부에게 일어난 일은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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