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운영」 부문간 조율 미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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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연초부터 벌써 몇번씩 물가대책·증시대책이 거듭되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해 4·4분기 경제성장률은 예상보다 높은 6.5%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고,제조업평균 가동률이 82%대에 이른 상황에서 부품수입 등이 크게 늘어 1월의 무역수지(통관기준)는 14억7천만달러의 적자를 나타냈다.
그런 한 구석에선 사립 중·고교들에 5백억원의 수업료를 보조해주고 대규모 지역개발사업을 시작하며 3천3백억원 농특세의 용처를 정하는 추경이 편성되고 있기도 하다.
얼핏 어지럽기까지 하고 무언가 경제전반에 대한 새로운 「조율법」이 나와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온 것은 물가·증시 등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대증책이었을뿐,통화·성장·재정 등을 포괄하는 새 정책조합을 위한 정부내의 정책조율능력은 아직 발휘되지 않고 있다.
특히 새 경제팀 출범 한달이 넘도록 부총리·재무장관·상공자원부장관·경제수석 등이 모이는 정책간담회는 아직 열린 적이 없어 새 경제팀의 정책조율 의지가 실종된 것 아니냐는 의문도 나오고 있다.
개방 경제에 걸맞는 새로운 정책조합이 없다보니 각각 따로 내놓은 정책들이 또다른 부작용을 내재시키는 일도 뒷전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나온 대책들을 중심으로 경제정책들이 과연 어느 부분에서 조율이 안되고 있는지를 짚어봐야 할 때다.
◎물가/“시장기능”서 억제로 선회/독과점업 규제는 긍정적
올해 물가정책은 사실 잘 정돈돼 있었다.
지난해 신경제가 고통분담을 내세워 억눌렀던 여러 가격인상 요인들을 연중 고르게 분산시켜 전체 물가에 대한 충격을 줄여가며 하나 하나 현실화시키겠다는 계획이 각 부처와의 협의를 통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계획들이 적어도 상반기중에는 물건너 갔다.
정재석부총리의 취임초 직설세인 「물가 소신」이 여론과 상부로부터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물가억제」쪽으로 급선회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규제완화에 힘쓰고 있는 정부가 연초의 자동차값 인상 해프닝에서 보듯 다른 한쪽에선 가장 중요한 「가격규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또 1·4분기 물가관리만을 위해 중고수업료 인상시기를 3월에서 6월로 늦춤에 따라 석달치 수업료 5백억원을 재정으로 메워줘야 하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목적세가 신설되면서 거꾸로 가고 있는 재정이 갈수록 이상한 모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고생을 둔 학부모들이 부담해야 할 수업료를 모든 국민이 골고루 나누어 내는 것이 옳으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물론 정부가 발표한 물가대책중에는 진일보한 것도 많다.
경쟁촉진을 통해 물가를 낮춘다는 취지로 개인서비스업의 진입규제를 풀겠다는 것은 규제완화 차원에서도 평가받을 일이다.
독과점업체나 예식장의 가격횡포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적극 나선 것이나,농산물 매점매석행위를 검찰고발로 대응하겠다는 것도 공정거래와 물가안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방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억눌린 가격을 언젠가 누군가는 풀어야 하고 그때까지는 재정이든 어디서든 대신 부담해야 하며,이 경우 경제는 왜곡된다는 것이다.<심상복기자>
◎통화/“안정적 공급” 어정쩡한 자세
통화의 고삐를 갑자기 죄면 금리가 오를 수 있다. 금리가 오르면 경제회생을 목표로 삼고 있는 현 정부는 정치적 부담을 안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지금은 경기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접어들어 있는데다 2·4분기부터 기업의 신규 투자가 살아나 자금수요는 하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질 전망이다.
실세금리의 대표인 회사채 유통수익률이 연 11.7∼11.8%로 떨어져 모처럼 「고금리」 망령이 사라지려는 참에 통화의 고삐를 죄면 금리가 오를 것이고 국내외 높은 금리차를 노린 외국자본은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면 원화의 값을 높게 평가(환율절상)시켜 수출이 불리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연초부터 오른 물가 때문에 당국의 통화정책은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김명호 한국은행 총재는 2일 『경제현상에 냉탕·온탕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전제,『증시 동향만을 보고 단기적으로 통화를 환수하는 등의 즉각적인 반응은 곤란하며 여러 경제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시열 자금담당 이사도 『올해의 총통화 관리 목표를 14∼17%로 잡았지만 물가불안요인을 줄인다는 기조 아래 가급적 낮은 수준으로 간다는게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요컨대 한국은행의 입장은 통화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기조를 유지해가되 증시동향에 맞춰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 실물경기에 충격을 주는 등 다른 후유증을 가져 올 수 있으므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명제 직후 현금으로 많이 풀린 총통화의 유통속도가 회복되면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고 있다는 감을 주는 것이다. 이 감은 물가오름세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조화로운 통화정책이 요구되는 것이다.<양재찬기자>
◎증시/자율화 역행하는 진정책/증자길 막혀 수급 불균형
2일의 증시진정책도 증시 하나만을 놓고보면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정책과의 「조화」에 있다.
우선 범정부적으로 추진중인 자율화 시책과 맞지 않는다.
81년이후 이번까지 22번이나 조정되면서 증시를 부양하거나 진정시키기 위한 단골메뉴로 자리잡은 위탁증거금률은 증권사와 투자자 사이의 문제지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다. 신용융자·스폿 펀드 등도 마찬가지다.
금융기관더러 주식형 수익증권을 사지 못하게 한 것과 기관들에게 1조원의 통화채를 안기겠다는 것도 「규제완화」와는 거리가 멀다.
통화채 문제는 특히 통화량·물가와도 관련이 있어 재무부내 관계부서 사이에서도 논란을 겪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증시대책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증시상황과 실명제의 본질적인 「마찰」에 있다.
지난해 전격 실시하면서부터 시중의 돈이 증자로 몰리도록 「설계」되어있던 것이 실명제고,또 실명제 이후 경제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많은 돈이 풀렸는데 이제와서 증시의 수급균형을 깨고 있는 것은 바로 실명제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수요가 늘면 기업의 증자 등 공급이 따라 늘어야 주가의 이상급등이 없을텐데,지분율을 지키기 위해 증자에 참여해야만 하는 대주주들은 실명제 아래서의 자금노출 문제 때문에 증자길이 막혀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실명제이후의 주가급등이 필연적인 결과였음에도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니 시장논리에 어긋나는 대책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증시상황은 증시대책으로만 풀 수 없으며,그렇다면 차라리 주가를 시장논리에 맡겨 뒷날 주가가 급락할 때 다시 정부가 몰려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을 미리 막아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고 있다.<민병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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