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들의 예산증액 경쟁/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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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근대 의회주의는 국민이 국왕으로부터 조세승낙권을 획득하면서 발달했다. 즉 국민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투쟁의 결과가 국회의 예산의결권 보유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의회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심의하면서 삭감수정할 수는 있어도 증액수정할 수는 없다는게 불문률로 오랫동안 지켜져왔다. 민자당이 원안통과를 다짐하고,민주당이 4천5백억원을 깎겠다고 별렀던 것도 최소한 국민의 세부담을 늘려서는 안된다는 이 원칙에 충실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막상 국회가 상임위의 예산안 예비심의에 착수하자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회 경과위를 제외한 15개 상임위가 소관부처 예산안에 대한 예비심사를 마친 결과 무려 4천1백3억5천만원이나 순증되었다. 행정부에 선심을 쓰거나 표와 연결되는 지역사업에 예산 따내기 경쟁을 벌인 탓이다.
보사위가 국가보훈단체 운영비 11억5천만원 등 1천2백11억원이나 늘린 것과 외무통일위가 남북회담 사무국청사 건립비 60억원을 늘려 잡은 것은 선심쓰기의 대표적 예다. 왜냐하면 돈이 늘어난 항목 대부분이 이미 경제기획원 예산안 편성과정에서 상당액 또는 전액 삭감된 경직성 경비이기 때문이다.
지역 민원성 사업도 다수 증액·신설되었다. 건설위에서는 전북출신 의원들이 똘똘뭉쳐 다른지역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지역의 용담댐 건설 사업비 1백억원을 계상하는데 성공했다. 또 교체위는 한 민자당 의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원주∼강릉간 철도신설 타당성 조사비 30억원을 신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위도 충남대 부지매입비 5억원,공주대 부속고교 건물수리비 2억원,방송대 강릉지역 학습관 신축비 10억원 등을 증액했는데 역시 해당지역 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국회살림을 맡은 운영위는 다른 상임위보다 한술 더 떴다. 대통령실과 대통령 경호실 예산을 원안대로 통과시킨 대신 의원활동 지원비 등 의원관련 예산은 7억2천여만원이나 늘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로비·청탁·압력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대국적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겠다는 예결위원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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