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만능주의로 가면 안된다(미국에서 본 한국: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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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의식개혁은 정부보다 종교서 다룰 영역/개인일에 간여 심하면 자율사회 흔들려
최근 클린턴 대통령 부인 힐러리여사가 미국병 치료를 언급하여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녀가 주장하는 미국병은 『도시는 희망을 포기한 미혼모와 권총을 찬 분노한 10대들로 차있고 나라 전체는 소외와 좌절,절망이 만연한 위기』라고 진단하고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이며 세계속에서의 개인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 점에서 「뜻이 있는 정치(Politics of Meaning)」,혹은 「덕의 정치(Politics of Virtue)」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여러자리에서 언급했다.
정신적 공백기를 겪고 있는 미국은 각 개인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사랑을 실현하는 개혁작업이 있어야 하며 이런식으로 사회도 재구성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통령부인으로서 미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다.
힐러리여사의 생각이 만약 정치로 나타날 경우 미국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힐러리여사가 인간개조를 포함하여 사회 개조를 꿈꾸고 있다면 그러한 생각은 사회공학적 발상으로 전체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정치의 영역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 정치라 한다면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종교나 도덕의 영역이다. 정치가는 정치의 영역을 지켜야지 인간을 포함하여 사회전체를 주무르려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개인의 인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다원사회로 구성된 미국은 정치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사실 세계 유일의 최강국인 미국 대통령의 힘이라는 것이 막강할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클린턴 대통령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의회통과를 위해 전국을 순회해도 미시간주 등 북부의 철강지대는 결사반대하고 있어 하원에서 아직 30여표가 모자라는 형편이다.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고 일사불란하게 되는 일이 없다. 기업가·농민·전문직업인·중소상인·샐러리맨 등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갖고 살아가며 그 힘이 미국을 유지시키고 있다. 정치는 다양한 세력과 집단간에 교통정리를 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부도 아니다. 지난 1년 사이에 스스로 정치를 떠난 상·하의원이 두명이나 있었다. 행정부의 차관 등 고위직 관리를 지내다 봉급이 적다고 기업으로 돌아가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정부나 권력이 만능이 아닌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새정부들어 금융실명제 등 여러가지 제도적 개혁이 있어온 것은 잘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 새정부가 점점 정치 만능주의로 빠져들어간다는 느낌이다.
이제 제도개혁이 어느정도 됐으니 의식개혁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정부는 제도나 법률을 통해 일탈된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임무다. 인간까지 뜯어고치겠다고 나서면 정치가 아니라 종교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한 의식개혁이 성공한 일이 없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골프가 과연 바람직하며 적은 봉급을 타는 공무원들이 어떻게 골프를 칠 수 있느냐는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골프를 치고 안치고는 개인이 결정할 일이지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워싱턴을 방문했던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자신이 새정부에 참여하면서부터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것을 유독 강조했다.
자기 돈으로 골프장을 갈만한 경제력이 있는 공무원들까지 골프장에 안간다고 한다. 개인이 결정할 영역을 정치가 간섭해서는 자율사회는 요원한 것이다.<문창극 전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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