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행 공전에만 능한 국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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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권이 어쩌면 미운 짓만 골라가며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국회가 할 일이 태산같은 터에 정기국회가 열리자마자 파행 공전이라니 이 무슨 국민을 실망시키는 작태인가. 우리는 국회일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티격태격하고 협상 같지도 않은 협상을 거듭하는 현상은 이제 지긋지긋하고 신물난다. 어쩌면 아직껏 이렇게 유치하고 좁쌀같은 정치밖에 못하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여야간부 얼굴들이 TV에 나오면 꼴도 보기 싫다는 시청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여야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야당이 국정조사기간 연장을 요구하면서 이를 정기국회 일정과 연계시킨것은 명백히 잘못이라고 본다. 12·12나 평화이 댐 같은 과거문제를 더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사기간 연장이 안된다고 정기국회를 못하겠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정기국회를 운영하면서도 조사는 계속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에 안되면 저것도 못한다는 식의 연계작전으로 대뜸 국회 공전부터 초래한 것은 졸렬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일정합의가 안됨에 따라 13일로 예정된 대통령 국정연설이 취소된 것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정기 국회초에 대통령이 국회에 나가 직접 연설하는 것은 바람직한 선례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이번 경우 야당요청을 청와대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마저 일정이견으로 무산된 것은 여야의 정치력을 의심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청와대측도 한두차례의 협상이 안됐다고 하여 예정했던 연설을 취소한 것은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야당이 이제라도 연계작전을 풀어 일정한 기간 운영일정에 합의한다면 기왕 국회를 존중하는 좋은 선례를 만들겠다는 취지가 있었던만큼 국회연설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야 정치권에 대해 부디 정신좀 차리고 자세를 가다듬기를 권고하고 싶다. 우리가 보기에 정치권은 지금 국민이 뭘 바라고,이 시대가 뭘 요구하는지 전혀 아는 것같지도 않고,자기들이 어떤처지에 놓여있는지에도 통감한 것 같다. 재산공개 결과 가장 돈많고 컴컴한 부도덕한 집단이 정치권이라는 의혹의 눈총이 느껴지지도 않는가. 국민관심사와 국정현안을 부지런히 짚고 지탄받던 구태를 하나씩 벗어던져도 상당기간 신뢰회복이 어려울 판에 고작 일정 따위로 국회 공전이나 시켜서야 말이나 되는가.
특히 안타까운 일은 야당의 무태이다. 지난 6개월간 야당이 한 일은 과거문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청산이 중요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현실의 물끓듯하는 수많은 문제를 두고 오로지 과거문제에만 매달리는게 공당의 할일인가. 과거문제는 90여명의 의원중 30명이 나서더라도 당의 주력은 현실에 대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권은 더 이상 짜증과 실망을 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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