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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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단어만으로 이룬 가장 어려운 시
첨예한 감각이 표현하는 ‘느낌’의 세계

시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김행숙은 어렵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 열 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당대 한국 시단을 통틀어서도 가장 난해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시인은 정작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시인이 들려준 일화 한 토막이다.

“등단하자마자 시 몇 편을 발표했어요. 어느 평론가가 비평을 했는데 전체 맥락은 호의적이었어요. 그런데 ‘김행숙은 어렵지만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꼬박 사흘을 울었어요.”
 
“왜요?”
 
“벽이…, 너무 강고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행숙의 시는 어렵지만, 시어 자체는 어렵지 않다. 사전에서나 봤음직한 희귀 어휘를 찾아내지도 않고 신조어 따위는 만들어낼 생각도 없다. 매니어만이 해독 가능한 은어도 구사하지 않으며 비어나 욕설 따위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앞서 적은 ‘눈사람’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초등학생 수준의 단어만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그러나 해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예컨대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란 시구를 보자. ‘눈사람이 작아졌다’란 사건과 ‘엄마가 죽었다’란 사건이 병렬 배치됐다. 그러면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동반해야 아구가 맞는다. 설명이 없으면 암시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그저 나란히 놓여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두 행! 도대체 어떻게 시장을 가야 ‘사소하게 시장을 가는’ 것인가.
 
김행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어와 시어가 만나는 자리, 시어와 시어가 이루는 문장의 의미가 뭇 정서와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난해한 시를 생산하는 여느 젊은 시인처럼 나름의 계산에 따라 모종의 실험을 도모하는 건 또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김행숙은 어떠한 예측도 차단한다. 자신의 느낌을 느낀 대로 말하고 있어서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작품설명을 듣는다.

“점점 작아지는 눈사람, 녹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느낌을 적고 싶었어요. 거의 안 보이는 나, 우리의 희미한 존재감 같은 것에 대한 느낌과도 통하지요.”
 
이제야 김행숙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정체를 드러냈다. 느낌이다. 점점 녹아서 결국엔 사라지는 눈사람에 대한 느낌을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표현했다. 녹기 전의 눈사람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눈사람이 작아지자 엄마가 죽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건 이미 사소한 존재가 돼버린 어른으로서의 우리이고.
 
이광호 예심위원은 “김행숙은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어를 대체하는 화법의 시인”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김행숙은 예쁘게 화장하거나 정성껏 포장하지 않는다. 심드렁하게, 느낌을 툭툭 던질 따름이다. 하여 김행숙의 시는 비쩍 말라 있다. 평이한 단어만 즐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행숙은 오늘 우리 시단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또는 느낌)을 지닌 시인이다. 다시 말해 당대 한국 시의 한 첨단이다. 하니 “모르겠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김행숙도 억울할 법하다. 어찌 타인의 느낌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느냔 말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유일한 '19세 이하 불가' 후보작

백가흠이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를 발표했던 이태 전 여름, 문단에선 말 그대로 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가흠이란 신예작가가 불쑥 들이민 세상은 여태의 한국문학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건, 온전히 패륜이었다. 단편 ‘귀뚜라미가 온다’의 한 구절을 옮긴다. 차마 신문에 옮길 수 없는 구절은 뺐다.

‘달구의 늙은 노모가 달구에게 매를 맞고 있다. … 달구분식의 노모는 가지런히 쪽 찐 머리가 일순 헝클어지도록 귀뺨 한 대를 아들에게 얻어맞았다. … 앞니가 몽땅 부러져 노모의 얼굴은 피범벅이 된다.’
 
백가흠의 ‘나쁜 놈’이 이전 한국소설의 ‘나쁜 놈’과 다른 건, 끝까지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노모를 패고, 장애인을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패악을 스스럼없이 자행했지만 그들은 한 번도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건 정상적이지 못한, 하여 끔찍한 이 세상을 향한 백가흠 식의 항의였다. 백가흠에 따르면 바르지 못한 세상은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한 치도 틀림없이 환원됐다. 그건 일종의 ‘생(生)의 방정식’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백가흠은 황순원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문학의 지평은 바로 그 만큼 넓어졌다. 달리 생각하면 백가흠이 순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글쎄다. 어미를 두들겨 패는 패악은 아무래도 잦아든 듯싶다. 그래도 19세 이하 독자에겐 권하지 못하겠다. 후보작 ‘루시의 연인’은, 앞서 적었듯이 ‘루시’란 이름을 지닌 남성 자위용 인형에 얽힌 이야기다.

소설의 주제는 분명하고 나아가 건강하다. 소설은 폭력의 사회성을 문제삼고 있다. 우선 준호의 가랑이가 군대에서 찢기는 대목을 보자. ‘준호는 친절한 고참들이 뭘 하려는지도 모르고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친절한 고참에게 악의가 없었던 것처럼 준호 역시 루시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 평소엔 옷을 입혀놓고 있으며, 못된 짓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위용 인형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제 아무리 선의(善意)가 발동했다고 해도 폭력은 폭력일 따름이다. 준호의 가랑이가 찢어졌을 때 고참들은 “180도가 아니라 한 200도로 찢어진 거 같다”며 박장대소했다. 루시의 처지도 비슷하다. ‘루시의 몸은 보통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젖혀진 다리는 어깨와 붙어 있어서 몸길이는 108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성인의 반 토막이다.’
 
백가흠 식의 ‘생의 방정식’은 이번에도 성립한다.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세상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고, 예심위원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는 솜씨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백가흠은 첫 작품집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인의 포즈는 시가 되지만 젊은 작가의 포즈는 후까시가 된다.’ 백가흠의 장점은, 그의 말마따나 ‘후까시’가 없다는 데 있다. 현재형의 날렵하고 담백한 문장이 복원하는 소돔의 풍경이 흉물스럽게 비치지만은 않는 이유다.

혹 오해가 있을까 싶어 밝힌다. 현실의 백가흠은 선량한 청년이다. 영락없는 모범생 인상인데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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