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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랑겔의 FTA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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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민주당 소속 찰스 랑겔(77) 하원의원은 ‘하원 사상 가장 힘있는 흑인 의원’이라는 평을 듣는다. 19선의 중진인 그는 당내 다선 순위 4위로 핵심 상임위 중 하나인 세출위원회 위원장이다. 뉴욕 맨해튼의 빈민가 할렘에서 태어나 그곳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그는 흑인 의원 모임(Black Caucus)을 창설한 주인공이다.

 미 의회가 한 달간의 여름 휴회를 막 시작한 지금 대다수 의원은 휴가를 떠났거나, 지역구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는 5일 일을 하기 위해 페루에 갔다. 휴회가 끝나면 세출위에서 다룰 미·페루, 미·파나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달 중순까지 페루와 파나마에 머물며 현지 사정을 두루 살펴볼 예정이다.

  랑겔의 여행은 미국과 두 나라가 맺은 FTA의 운명을 판가름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미 의회 소식통들은 말한다. “그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미 의회의 비준을 받을 수도, 폐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랑겔의 시각은 한·미 FTA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그를 통해 FTA에 대한 민주당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루와 파나마 의회는 이미 미국과의 FTA를 비준했다. 그러나 미 의회는 손을 안 대고 있다. 민주당은 “페루·파마나가 노동·환경 법규를 미국 법에 일치할 정도로 대폭 고치면 비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랑겔이 두 나라에 가는 건 법규 개정 의지와 내용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그의 보고를 받고 나서 비준 문제를 다룰 방침이다.

 민주당을 바라보는 미 행정부의 시각은 곱지 않다. 수전 슈워브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주권국가에 일방적으로 국내법을 바꾸라고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며 “의회는 조건을 달지 말고 비준 절차를 진행해 달라”는 서한을 낸시 펠로시 (민주) 하원의장 등에게 보냈다.

 슈워브의 지적은 타당하다. 민주당의 요구는 내정 간섭에 해당할 정도로 지나치다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중론이다. 하지만 힘이 빠진 부시 행정부가 의회 다수당으로, FTA 비준 동의권을 보유한 민주당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행정부 일각에선 “랑겔이 시야를 넓히게끔 그의 여행을 돕는 게 오히려 낫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랑겔은 자유무역론자도, 강성 보호무역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지난해 2월 한·미 FTA가 필요하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한·미가 서명한 FTA 협정문에 대해선 “자동차 분야에 불만이 많다”며 찬반을 유보하고 있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엔 반대했지만 미국과 호주·싱가포르·모로코 FTA 등엔 찬성했다.

 그의 의회 사무실엔 턱수염을 조금 기른 젊은 군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미 2사단 제503 야전포병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찍은 그의 사진이다. 그는 1950년 11월 중국의 개입으로 미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할 때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그 당시 대대원의 절반이 전사했다.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전투에선 중국군에 포위당한 채 사흘간 싸우다 전우 40여 명과 함께 겨우 탈출했다. 종종 “군우리 때보다 더 나쁜 날은 없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런 그가 이번 ‘FTA 여행’을 통해 좀 더 깬 시각을 가다듬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미국과 페루의 연간 무역규모는 88억 달러다. 국내총생산(GDP)이 13조 달러가 넘는 미국의 경제규모에 비하면 콩알처럼 작다. 하지만 반미 좌파 정권이 적지 않은 중남미에서 페루가 갖는 전략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미·페루 FTA 추진의 동기다. 한국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한·미 동맹과 경제교류 등을 생각한다면 자동차 문제는 지엽말단에 불과하다는 걸 랑겔이 인식하는 여행이 되길 바란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