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시로만 움직이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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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슬롯머신사건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축소 움직임이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로 제동이 걸린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성역없이 수사하라는 대통령의 엄명에 따라 검찰이 자체 내부의 비호세력여부에 대한 수사까지 벌이기로 했다니 국민적 공분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사건이 남김없이 파헤쳐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검찰에 대한 이번 대통령의 지시를 보면서 우리 관료조직의 오랜 고질을 또한번 실감하는 심정이다.
검찰이 당연히 할 일을 왜 굳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서야 하게 되는가. 슬롯머신사건의 이른바 비호세력에 관한 온갖 소문이 무성한 터에 박철언·엄삼탁씨만으로 수사를 끝내서는 국민적 의혹을 씻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강력한 배후수사가 계속돼야 함은 당연한 일인데도 검찰이 적당히 끝내려는 인상을 준 것은 결국 권력형사건에 대한 오랜 미봉타성이 아닌가. 더욱이 고위 검찰간부 관련설까지 있고 보면 껄끄러운 내부수사를 피하자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의 눈치를 보거나 지시를 받고서야 움직이는 현상은 검찰 뿐 아니다. 교육부의 경우 지난번 대입부정입학자 명단을 공개하면서 일부 명단을 내놓지 않았다가 대통령지시가 있고서야 추가공개를 약속했고,보사부는 약국의 한약조제문제를 둘러싸고 9개 한의대생 4천명이 60일째 휴업을 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의 지시가 없는 탓인지 방치만 하고 있다. 경제부처도 대소사를 청와대눈치에 따라 끌고나가는 인상이 역연하고 이른바 신경제추진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고하다 오히려 대통령으로부터 지적까지 당한 형편이다.
우리는 정부조직의 이런 소극적·수동적 자세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도 관료조직이 견인차가 되어 분야별로 방향을 잡고 구체안을 밀고나가야 할텐데 대통령이 시키면 하고 안시키면 안하는 상태로서야 어떻게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대통령이 만사를 다 챙기고 일일이 지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부가 전체 관료조직의 일하는 태세를 점검하고 각 조직의 활성화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정이 겁나고 대통령의중을 감잡지 못해 엉거주춤하는 기간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다. 적극 할 일과 해도 좋은 일 해서는 안될 일을 정부차원에서 명확히 해서 일하는 관료조직으로 밀고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혁작업도 돌출비리사건을 사법처리하는 단순사정의 반복이 아니라 대통령이 일일이 지시않고도 지속적 개혁이 진행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한다.
새정부가 들어선지도 이제 1백일이 가까워온다. 각 부처도 자리잡을 때가 됐고 새 정부다운 정책·행정의 스타일도 차차 정착될만하다. 언제까지 대통령지시로 움직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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