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벡식 '온화한 카리스마' 안 먹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2006년 6월, 독일 월드컵에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끌던 한국축구대표팀은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 직후 대한축구협회는 서둘러 핌 베어벡(사진)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거스 히딩크 감독을 도와 4강 신화를 이끌었고, 2006년 월드컵에서도 수석코치를 맡았던 그가 누구보다 한국 축구를 잘 안다는 게 선정 배경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를 거치면서 다듬어진 한국 축구의 체질을 같은 네덜란드인인 베어벡이 잘 계승시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축구협회는 '연속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파격적으로 그에게 올림픽팀과 대표팀을 한꺼번에 맡겼다.

그러나 1년 동안의 과정, 그리고 결승 진출에 실패한 아시안컵에서의 내용을 보면 베어벡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한국 축구와 궁합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이라크와 이란에 연패해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고, 올 5월 베이징 올림픽 지역예선에서는 약체 예멘에 지는 바람에 올림픽 지역예선 13연승, 29연속 무패 기록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시안컵에서는 준결승까지 1승3무1패(승부차기 공식 기록은 무승부)에 5경기 3득점(경기당 0.6골)이라는 빈약한 성적으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아시안컵에 유럽파들이 대거 빠졌고, 1차 목표인 4강 진출은 달성했다고 하지만 '아시아의 맹주'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울 정도다.

베어벡은 히딩크나 아드보카트가 갖고 있었던 강한 카리스마가 없다. 대신 어머니처럼 선수들을 다독이며 끌고가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로 한국 선수들을 장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실제로 이번 아시안컵 도중 이동국이 그의 전술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고, 이천수는 다른 선수에게 맡긴 프리킥을 가로채 자신이 차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뚜렷한 한국 축구에서 고참들을 장악하는 것은 감독의 중요한 역할이다. 히딩크 감독의 성공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의 방침에 반발하는 스타급 고참 선수들을 과감하게 제외시킨 것이다.

베어벡은 "빠르고 강한 대표팀을 만들겠다"고 호언했지만 현 대표팀에서 5년 전 보았던 스피드와 강한 체력은 사라졌다. 아시안컵을 지켜본 축구팬들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보다도 못한 스피드와 조직력을 지적했다. 축구협회는 월드컵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한국 축구를 그가 잘 계승해 발전시켜 주기를 바랐지만 현 대표팀은 마치 히딩크 이전의 대표팀을 보는 듯하다.

베어벡의 전술은 '공 점유율을 높이고, 측면돌파에 의한 크로스로 득점을 노린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훈련 때조차 중앙돌파 연습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단조로운 공격 전술은 상대에게 번번이 읽히기 마련이다.

한국은 28일 일본과 3~4위전을 치른다. 이 경기에서 이겨야 2011년 아시안컵 자동출전권을 얻는다. 더구나 한.일 전이다. 이 경기 결과에 따라 베어벡의 경질 논의가 다시 불붙을 것이다. 축구협회가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쿠알라룸푸르=정영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