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성’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크리스천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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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23일 일본 도쿄에서 온누리교회 하영조 담임목사(오른쪽에서 두 번째)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온누리교회 제공]

1970년대 ‘신과 인간’ ‘영성과 이성’을 놓고 기독교계와 격렬한 논쟁을 펼쳤던 이어령(73·전 문화부장관) 중앙일보 고문이 23일 일본 도쿄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족과 목회자만 참가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된 세례식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는 무릎을 꿇은 이 전 장관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곁에선 연극배우 윤석화씨가 노래를 불렀고, 이 전 장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세례를 받은 직후 그는 “자연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신령으로, 영성으로 태어나는 오늘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후 6시 프린스파크도쿄타워 호텔 연회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리더 800여 명을 대상으로 온누리교회가 주최한 ‘CEO 리더십 포럼’이 열렸다. 이 전 장관은 일본어로 ‘이성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주제의 강연을 했다. 강단에 세워진 ‘최후의 만찬’ 그림을 가리키며 “이 그림에는 반역자 유다도 있다. 강연을 하는 제가 오늘 ‘반역자’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이 지켜봐 달라”고 농담을 던진 뒤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가 크리스천이 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오후 2시부터 넌크리스천(Non-christian)에서 크리스천이 됐다. 이건 내게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이성, 인간의 지성을 강조해왔던 그이기에 ‘세례’는 더욱 놀라웠다. 이 전 장관은 “지금껏 나는 이성의 힘, 지성의 힘으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지성과 영성, 그 문지방 위에 서있다. 나도 궁금하다. 내 앞에 놓인 게 과연 ‘벽’인지 ‘문’인지 말이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란 지적이었다.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의 관계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이 전 장관의 모습.

인터뷰 자리에서 따로 만난 이 전 장관에게 ‘세례의 계기’를 물었다. 그는 크리스천인 딸 얘기를 꺼냈다. “딸이 암을 이겨내는 걸 보며 절망과 희망을 봤다. 나는 딸에게 죄의식이 있다. 지금껏 항상 바빴고, 항상 미안했다. 세례는 딸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기도 하다. 또 젊었을 적부터 나는 ‘메멘토모리’(라틴어에서 유래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를 계속 얘기해 왔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소우주의 창조주다. 누구나 ‘나의 세계’ ‘나의 우주’가 있다. 그런데 그 속의 절망에 나는 공감한다. 그래서 늘 강연과 책에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해 왔다.” 결국 ‘나의 우주’는 본질적으로 닫힌 세계, 닫힌 우주란 의미였다. 또한 그 속에 갇힌 게 ‘인간’이라고 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전 장관은 삶의 모순, 세계의 모순을 꺼냈다. “문을 열면 바람이 들지만 모기도 들어온다. 그런데 문을 닫으면 모기는 막지만 바람이 들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망창(망으로 된 창)’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도 그런 의미라고 본다. 모기는 막고, 바람은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게 영성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그는 세례를 ‘다시 태어나는 생명’에 비유했다. 세례를 받을 때 부었던 물을 ‘태반 속의 양수’라고 했다. “세례를 받고 보니 아이가 태어날 때 왜 우는지 알겠더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도 고통스러웠다.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고통이 없이는 영성의 문지방을 넘을 수가 없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럼 그는 지금껏 삶의 동력이자, 엔진이었던 ‘이성’과 ‘지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걸까. 이 전 장관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걸 넘어서고자 할 따름이다. 그 속의 한계를 알기에, 그 절망을 알기에 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신과의 만남은 결국 ‘접속’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오, 너 불쌍하구나. 이리 오너라’라고 하지 않는다. 7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도 그런 것은 없었다. 결국 내가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이·어·령’이란 나의 아이디(ID) 번호를 넣어서 접속을 해야 했다. 마치 인터넷에 접속하듯이 말이다. 그럴 때 신과의 접속이 이루어지고, 다운로드도 가능해지리라 본다.”

 한편 온누리교회는 ‘한·일 CEO 리더십 포럼’을 시작으로 24일 오후 7시 도쿄 사이타마현의 실내체육관 수퍼아레나에서 한류 스타를 앞세운 문화 선교행사인 ‘러브 소나타’를 개최했다. 조승우·한혜진·오연수·손지창·신애라·유호정·려원 등 연예인 22명과 프로골퍼 최경주가 참석했다.

 이들을 향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무려 2만3000여 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그 중 1만8000여 명이 일본인이었다. 하용조 담임목사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사랑과 용서”라며 “한국과 일본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온누리교회는 하반기에 센다이와 사포로에서 ‘러브 소나타’ 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도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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