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취적 깊이』획득에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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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터미네이터』에 열광하는 젊은 영화팬들로서는 쉬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서부영화가 영화 관객의 상상력을 사로잡던 시절이 있었다. 광활한 황무지를 개척하는 서부 사나이들의 모습은 모험에 굶주려 있던 영화팬들을 얼마나 매혹시켰는지.
60년대 중반 세르지오 레오네가 들고나온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은 서부극의 고전적인 신화를 잔인하게 파괴함으로써 세계의 영화팬들을 경악케했다. 무의미한 살육이 난무하는 윤리적 진공지대로 서부를 묘사한 이 영화들은 결국 서부극의 죽음을 앞당겼다.
이 스파게티 웨스턴이 낳은 최고의 스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62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서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왕년의 총잡이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잔영을 보려는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 신화를 되살리려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한 무법자 윌리엄 머니는 캔자스의 촌구석에서 돼지를 키우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그에게, 젊은 현상금털이 키드가 동업할 것을 제의하자 그는 11년만에 다시 총을 잡는다. 이 왕년의 영웅이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거는 현상금이란 다름아닌 변두리 사창가의 작부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목장의 건달들을 처치하기 위해 내건 것이다. 그리고 머니 자신도 이젠 말안장에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는 초로의 초보에 지나지않는다. 과거의 동료 로건까지 끌어들여 3인조를 구성한 이들의 앞길엔 유년기적인 폭력성을 간직하고 있는 악덕 보안관 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상한 서부극이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장르 서부극의 전통이 아니다. 여기에는 정통 서부극의 장쾌함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무정부주의적인 활력도없다 (하긴 이러한 전통들은 이미 7O년대 초반에 사형선고를 방지않았던가). 클린트이스트우드가 의도한 바는 영광스런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아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스타로서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반성에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최근의 미국영화로선 드물게 보는 정상적인 깊이를 획득한 것도 이러한 그의 반성적인 인식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늑대와 함께 춤을』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는 아직도 정의를 행할 수 있다」는 식의 자기 만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재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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