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學良과 宋美齡(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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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26면

대만 타이베이 스린(士林) 관저에서 그림을 그리는 쑹메이링과 이를 지켜보는 장제스. [김명호 제공]

쑹메이링(宋美齡)은 시안을 폭격하려는 난징 정부의 결정을 보류시키고 1936년 12월 22일 시안으로 떠났다. 비행장에 나온 장쉐량(張學良)을 보는 순간 난징에서부터 굳어 있던 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장제스(蔣介石)를 대신해 장쉐량과 옌안에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했다. 내전 중지, 항일전쟁 준비,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 장쉐량 신변보장과 장제스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

쑹이 온 지 3일 만에 모든 게 평화적으로 끝났다. 12월 25일 장제스는 석방돼 장쉐량과 함께 난징으로 돌아왔다. 성탄절에 장제스를 석방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쑹의 성탄 예배 참석 때문이었다. 시안 사변이 난해하고 희극성이 강한 이유는 순전히 장쉐량과 쑹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난징까지 배웅한 장쉐량을 감금했고 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대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는 당부를 장징궈(蔣經國)에게 세 번이나 했지만 쑹은 장쉐량을 장제스 시신 앞에 인도해 작별을 고하게 했다. 장쉐량은 “두터운 정은 골육(骨肉)과도 같았지만 정견의 차이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는 대련(對聯)으로 반세기에 걸친 은원을 정리했다.

장쉐량은 쑹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쑹이 하루를 더 살면 나도 하루를 더 살 수 있다”고 술회했다. 88년 1월 장징궈도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있던 쑹이 귀국해 국민당 원로들과 접촉했다.

90년 6월 국민당이 마련한 장쉐량의 90세 축하연이 열렸다. 53년 만에 장쉐량의 모습이 공개됐다. 쑹은 불참했지만 당일 이른 새벽에 복숭아 9개를 장쉐량에게 보냈다. 참석했어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나이도 94세였다. 두 달 후 이들은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 10여분간 안부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다음해 3월 장쉐량은 미국으로 떠났고 6개월 후 쑹메이링도 뉴욕으로 돌아갔다.

미국 컬럼비아대 장쉐량 자료실에는 쑹이 대륙 시절 직접 그려 선물한 폭하청천도(瀑下聽泉圖)가 제일 앞에 걸려 있다. 500여 통의 편지도 소장돼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쑹메이링과 주고받은 100여 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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