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공습'(上) 삼성까지 비상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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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이 사실상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인력감축 가능성도 예고했다. 국내총생산의 17%를 차지하는 삼성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음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삼성은 반도체 가격 하락, 고유가와 함께 환율을 어려움의 주범으로 꼽았다. 재계 관계자는 "한 해 10조원의 순이익을 내는 삼성이 이럴 정도라면 다른 그룹이 겪는 고통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가장 큰 어려움으로 원화 강세를 꼽는다. 유가 고공행진은 세계 공통의 현상이지만 한국 원화만 비정상적으로 강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초부터 지금까지 원-달러 환율은 20%, 원-엔 환율은 30% 이상 떨어졌다.

◆손해 보고 수출하는 단계=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원-엔 환율 하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5년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우리 제품의 수출단가는 0.8% 오른 반면 일본 제품의 수출단가는 1%가 떨어졌다. 우리의 주력 수출품인 승용차(2000cc 기준)의 경우 일본산 제품의 가격은 같은 기간 1만8500달러대를 유지한 반면 한국산은 1만6358달러에서 1만8795달러로 오히려 일본산보다 비싸졌다.

수출보험공사가 조사한 수출기업의 손익분기점 환율은 대기업의 경우 달러당 928원, 중소기업은 951원이다. 지난 주말 환율은 달러당 923.8원이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생활용품.섬유류의 수출은 2005년과 2006년 연속 평균 8.5%씩 줄었다(한국은행). 그만큼 한계에 달한 중소기업들이 수출 물량을 줄인다는 뜻이다.

환율 압박으로 수익성도 나빠졌다. 현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수출 물량은 1990년 이후 연평균 14.2% 증가하고 있는데, 영업이익률은 2000년 8.26%에서 지난해에는 4.9%로 반토막 났다. 한 무역업체 대표는 "보통 수출은 6개월 전에 주문을 받아 선적하기 때문에 원화 환율이 급락한 올 상반기에는 거의 전 업종에서 손해 보고 수출했다"고 말했다.

◆엔저가 더 괴롭다=수출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상당 품목이 일본 제품과 치열하게 경합한다. 그래서 원-엔 환율이 떨어지면 가격경쟁 때문에 가격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닷컴에 46인치 LCD TV를 2300달러에 내놨다. 소니의 경쟁제품(2250달러)보다 비싼 가격이다. 삼성전자 북미 마케팅 관계자는 "제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수익성을 맞추기 위해 오히려 가격을 올렸다"고 말했다. 한 기계업체 관계자는 "삼성처럼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경우는 일본과 맞대결을 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수원에 있는 중소기업 W사의 이모 사장은 "요즘 일본 제품이 싸다며 거래처를 바꾸는 바이어들이 늘어 수출이 거의 끊겼다"며 "한 바이어가 가격을 일본 수준으로 해주면 구입하겠다고 했지만 가격을 맞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무역협회가 776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88.2%의 기업이 올해 사업계획을 짤 때 원-엔 환율을 760원 이상에 맞췄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현재 엔화는 740원대로 떨어졌다.

◆과거 좋았던 수출실적이 도리어 짐="환율이 좋았을 때 수출을 너무 많이 했던 것이 수출업계에 부메랑이 되고 있다." 한세무역 임승종 이사의 말이다. 2~3년 전의 수출 호조로 수출금융한도가 늘어났고, 기업들은 금융한도까지 주문을 받고 돈을 빌려 수출품을 만들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산한 수출품을 쌓아둘 수도 없어 손해를 보면서 수출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공장 설비를 늘려놓은 기업들도 애를 먹고 있다. 전자회로기판 업체인 S사 관계자는 "주로 일본과 동남아에 수출했는데 지금 일본 수출을 포기했다"며 "공장을 세울 수 없어 돌리고는 있지만, 환율이 오르기만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수출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높은 환율 덕분에 해외시장을 확 키웠다. 현대자동차.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브랜드들이 해외에서 경쟁력을 갖게 된 것도 유리한 환율에 따라 가격 경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율이 떨어지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양선희.박현영.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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