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주총연기 무슨 소린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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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해마다 2월에 열리던 시중은행 주총을 금년에는 새정부출범후로 연기하도록 요구했다는 보도는 개혁과 자율의 실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은행법의 개정으로 3월 주총개최에 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도 인수위의 그같은 요구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시중은행의 임원인사에 새 정부가 간여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달리 해석하기가 어렵다.
우리 경제의 병목현상을 가장 심각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부문이 금융산업개편이 시급하다는데 대해서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금융자율화의 핵심이 은행의 자율 인사권확립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부로부터 은행으로 인사권을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민자당이 선거공약에서 내세운 「신한국」과 「신경제」의 뼈대가 자율이었음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누구보다 먼저 인수위가 자율실천의 정신에 투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이 당선후 처음으로 조직한 기구가 인수위이기 때문에 특히 새해 국정을 논의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수위가 취하는 입장은 새정부의 개혁공약과 자율실천의 의지를 미리 가늠해보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시중은행 주총연기요청에 대한 보도가 있은 다음날 인수위에 보고된 재무부 업무내용 속에는 은행장의 자율선임방침이 제시돼 이에 대한 금융계와 국민들의 당혹감이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인수위가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수위의 시중은행 주총연기 요청은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따지고 보면 김 차기대통령이 소리높이 외쳐온 공정대사의 과제와 금융자율화라는 두개의 중대국사가 함께 얽힌 사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무부가 업무보고에서 은행자율인사계획을 밝힌 것과는 별도로 인수위 자체가 이 문제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는게 좋겠다고 본다.
매사는 첫걸음이 중요하다. 시작이 희미해지면 국민들은 다시 한번 「말로만 하는 개혁」에 실망을 느끼게 되고 국민들의 절대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는 개혁의 과업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 뻔하다.
기왕 은행장인사가 큰 관심사로 떠오른 이상 은행장의 선임에 정부의 입김을 철저히 배제하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새정부의 출범직후에 금융자율화의 튼튼한 초석을 놓고,또 인사문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고히 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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