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경 칼럼] 과거 수출진흥회 닮은 청와대 토론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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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27면

그건 토론회가 아니었다. 지난달 26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대학총장 152명의 만남에 대한 생각이다. 왜 그 모임을 토론회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토론회 후 아이들이 혹시 토론회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날 텔레비전에 비친 청와대 모임은,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자주 중계되던 수출진흥회의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수출진흥회의는 관계장관과 비서관이 배석하고, 많은 수출역군이 대통령의 지도와 격려를 받는 매우 권위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진 회의였다. 그런 회의가 권위적인 이유는 발언의 권리가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고 행사의 모든 요소가 대통령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토론회는 권위주의와 어울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상적인 커뮤니
케이션 상황을 탐구한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 따르면 바람직한 토론 환경은 모든 참석자에게 동등한 발언권과 강요되지 않는 발언 환경을 보장한다. 토론의 주제가 제약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대통령과 대학총장의 만남은 이런 기본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발언권은 대통령과 장관이 주로 행사했으며, 대학총장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듣는 사람으로만 행사장을 지켰다. 주제 또한 청와대와 교육부가 제시한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어느 신문은 토론은 없고 훈시만 있었다고 했다. 다른 신문은 사설 제목에서 대통령은 사단장이고 대학총장은 졸병이냐고 묻기도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토론회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점이다. 지난달 17일에는 한국언론재단 초청으로 국정홍보처가 추진하는 취재시스템 선진화 조치들에 대한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이 토론에는 대통령과 기자협회장, PD연합회장, 오마이뉴스 대표,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 90분 동안 진행된 이 토론회도 대학총장들과의 만남보다는 나았지만, 분위기가 대통령 주도로 흘러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부 참석자는 토론한다기보다 민원을 얘기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토론은 민주주의의 바탕이자, 민주정치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근에 목격한 두 차례의 대통령 토론회는 지극히 권위적인 한국식 정치대화의 모습만 재확인하는 기회였다. 듣고자 하는 생각이 없어 보이는 대통령의 모습은 1970년대 권위주의 정치문화와 21세기 참여정부의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우쳐줬다.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한국 민주화의 성숙을 축복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다.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네 번쯤 뽑고 나니, 우리는 어느덧 민주화가 완성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 토론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를 다시 돌아보도록 주문한다.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가 권위적인 커뮤니케이션 문화다.

과연 대통령의 독단적 커뮤니케이션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일까,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일까.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국민과 토론하는 자리는 국민의 소리를 듣는 자리여야 하나. 아니면 대통령이 정책을 설득하는 자리여야 하나.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사회공동체는 커뮤니케이션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성격이 민주적이냐 권위적이냐가 그 사회공동체의 성격이 민주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통령과 대학총장의 청와대 만남은 민주적 토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점에서 이날 행사는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위해 극복해야만 할 과제를 분명히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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