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의 정치참여/최각범(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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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춘기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이런 질문을 받게된다. 『세상에 돈이면 다된다고 생각하는가. 돈만 있으면,세상에서 갖고싶은 것 다 갖고,권력도 살 수 있고,일류학교도 나올 수 있고,절세미인의 마음도 얻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대답은 언제나 아니올시다였다. 세상에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의 아들이라 해도 자기실력이 없으면,일류대학에 못들어가지 않는가. 그리고 대통령을 보라. 뭐 저사람이 돈이 많아서 대통령이 되었는가. 또 아무리 돈에 팔려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조와 예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돈이면 다 되는건가
그러니까 세상은 살맛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춘기의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고,그러니까 그들은 인생의 참의미에 대해서 고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세상꼴이란게,이게 무엇인가. 기부금 입학제가 거론되어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았다 싶은 경쟁질서의 정통성마저 잃게 만드는게 아닌가 했더니,드디어 엄청난 금력으로 권력에 도전하는 일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클린턴이 여인스캔들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을 때도,그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라는 것 때문이었는데,우리나라 부유층 사회의 스캔들 뒤에는 이상하게도 돈얘기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니 사춘기시절의 그 유치하다 싶던 질문도 이제는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된 이상한 시절이 된 것이다.
○일 기업인은 후진양성
아직도 많은 세계기업인의 존경을 받고있는 일본의 고 마스시타 고노스케(송하행지조)회장도 한때 일본 정치의 후진성에 크게 불만을 느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마쓰시타그룹 이사회에서 주식처분이 거부됨으로써 좌절됐다. 마쓰시타는 대신 그의 사재로 송하정경숙을 세워 일본의 정치·경제를 주도할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일본사회의 미래에 기여하기로 했다. 또한 마쓰시타 계열기업은 기술로 앞서가는 기업,교육을 정성스럽게 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처음 기업을 일으키면서 일본의 국익과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겠다던 마쓰시타의 의지는 그의 사후에도 계속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벌이 당면한 세계시장에서의 경제전쟁을 제체두고 정치에 띄어든 현실과 일본의 대표적 재벌이 회사의 뜻에 따라 개인의 정치적 참여를 단념한 사실의 차이는 개인적 인격과 의지의 다름에서만 연유되지 않는다. 아직도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하는 우리의 가족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법인자본주의의 체질을 갖춘 일본경제의 차이가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개 일본사회의 경우 법인이 회사의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일본 증권거래협의회의 자료에 의하면 1989년도 현재 금융기관·증권회사·사업법인 등이 일본 전체주식의 72.8%를 소유하고 있고,개인의 주식소유는 전체의 22.6%에 지나지 않는다. 법인이 법인을 소유하는 반면,개인소유주들은 이산돼 있기 때문에 개인 자본가가 기업경영을 전업하는 사태는 일어나기 어렵다. 일본인의 행위규범은 회사본위고,일본은 회사국가며,일본의 노사는 회사주의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일본의 법인자본주의적 성격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업은 수조원을 넘는 부채를 가지고 있는데,개인은 스스로도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수조원 규모의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일은 법인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대주주가 자의로 할 수도 있는 사유재산의 처분을 회사에 물어본 마쓰시타그룹의 기업문화는 기업조직이 특정인을 위해,정당조직을 대찬해 선거운동까지 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부끄럽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선진국과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차이가 아닐까.
○기업 건실화가 더 긴요
부자라고 해서 정치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선진국에서도 기업가든 군인이든 학자든 노동자든 전혀 출신과 배경을 달리하는 많은 유형의 집권자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부터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로,기업은 소유와 경영을 구분해야 하며,기업조직과 정당조직 또한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많은 국민이 바라는 기업인의 모습은 기업의 발전에 전념하는 태도다.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사재를 기업에 재투자 하여 재무구조의 건실화와 기술개발에 보다 힘쓴다면 기업을 사랑하고 나라의 경제를 걱정하는 많은 동포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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