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북핵 본질은 BDA·영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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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동안 조용하던 북한 핵 문제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북.미 간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꽉 막혀 있던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문제가 지난주 일단락된 것이 계기다. BDA에 예치돼 있던 북한 자금이 뉴욕 연방준비은행을 거쳐 러시아 중앙은행으로 이체된 뒤 러시아 극동상업은행의 북한 계좌로 송금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초청하는 등 영변 핵 시설 폐쇄를 위한 조치에 착수한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신속한 움직임들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13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공식석상에서 "앞으로 며칠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이제 영변 핵 시설이 봉인되고 2.13 합의는 이행되는 것인가. 나아가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로 2005년 9.19 합의에서 약속한 한반도의 비핵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질서가 이룩될 것인가.

지금 국내의 분위기로 봐서는 영변 핵 시설을 폐쇄하면 2.13이 지켜지는 것이고, 좀 더 인내를 갖고 북한을 설득하면 북한의 과거 핵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해 2005년 9월 19일 6개국이 합의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이번 국면을 계기로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의 숙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착오를 막고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영변 핵을 폐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성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2.13 합의의 전부가 이행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북핵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다. 2.13 합의는 영변 핵 시설의 폐쇄.봉인뿐 아니라 사용 후 연료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 등 모든 핵 프로그램의 목록을 밝히는 것을 포함한다. 북한의 초지일관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간 명백히 드러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진척도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의 현행 핵 프로그램을 모두 밝히고 이를 중단, 폐쇄하는 데까지가 2.13 합의의 이행이다. 북한이 이미 제조한 핵탄두들, 추출해 둔 무기급 플루토늄마저 제거해야 비로소 9.19 합의가 실현된다. 이와 함께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져야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체제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북한은 그간 6자회담을 '핵 군축회의'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핵 지위를 기정사실화하겠다는 의도다. 영변을 포기하는 대신 과거의 핵을 묻지 말라고 요구함으로써 '작지만 확실한' 핵 국가를 계속 추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와 어려운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북한의 결단을 과연 기대해도 좋은가. 북한이 요구하던 BDA 문제가 풀렸으니 이제 북한이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는 분석은 너무 안이하다. 미국이 BDA 문제의 해결을 약속했고, 늦게나마 이를 이행했으니 북한도 2.13을 지킬 것이라는 식으로 마치 북한을 원칙과 신용의 국가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BDA 자금의 회수를 약속한 것이고, 북한은 정상적인 국제금융거래까지 보장하라며 버티는 바람에 생긴 해프닝 아닌가.

BDA 문제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로 인해 촉발되었으나 이 문제가 아직도 깨끗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세계의 어느 금융기관도 '오염된' 북한의 돈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스스로를 개방해 국제사회로 나오려면 핵을 버리는 대신 신용을 쌓아야 한다. 당초 약속을 깨고 한나라당 대표단의 귀빈석 착석을 거부해 6.15 행사를 파행으로 몰고간 게 바로 며칠 전이다. BDA와 2.13 합의의 해결이 북한 핵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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