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튀면 그만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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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지검의 집계에 따르면 거액의 사기를 하거나 부도를 내고 해외로 도피한 경제사범이 9백25명이나 되고 이들로 인한 피해액수도 1조원이 넘는다. 또 이들 가운데는 전 총무처장관,전 치안본부장,중동학원 이사장,신한인터내셔널대표 등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행세깨나 해온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중 상당수는 그들이 끼친 피해에는 아랑곳 없이 도피생활중에도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들이 끼친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도 적지 않지만 거기에서 끝날 문제만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행태가 이 사회의 기강을 흔들어 놓고 있다는데 있다. 일이 잘 풀리면 잘 풀리는대로 떵떵거리며 행세하다가 안되면 해외로 빠져나가 그동안 남에게 피해를 주고 모은 돈으로 편안히 개인적인 안락이나 추구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우선 맥부터 풀릴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경제사범은 있는 것이지만 일이 잘못되면 해외로 달아나는 경우가 유달리 많은 것은 우리 사회의 특이한 현상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부나 명예,권력의 기반이 취약한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정당한 과정을 거쳐 땀흘려 얻은 것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일이 잘못돼 그것을 잃게 되는 경우라도 재기를 위한 안간힘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쉽게 얻었던 것이라면 잃었다해서 크게 애석해 할 것도 없기에 그저 제 한몸만 빠져나가 안일을 탐할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법망이 허술했던 것도 또 한가지 원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국내사정으로 인해 국제적인 사법공조를 꾀하기가 어려웠었다. 최근들어 중요 범죄에 대한 사법공조를 강화해 나가고 있으나 아직 경제사범에 대해서까지는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국제적인 협력을 어떻게 강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편 인신구속위주의 법운용이 경제사범의 도피행위를 조장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구속을 너무도 당연시하기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부도가 나면 일단 먼저 몸을 숨기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몸이 자유로워야 피해자들과 화해할 시간도 갖고 수습책도 마련할텐데 무조건 구속만 해대니 우선 몸을 피할 수 밖에 없다는 변명도 나온다. 경제사범의 경우만이라도 도주의 우려가 없는한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면 본의아닌 도피를 줄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당장 검찰이 해야할 일은 명단이 발표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해당국 정부에 집중적인 교섭을 벌여 본국 송환의 결과를 얻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일수록 좋다. 그래야 경제사범들에게도 경종이 되고 사회의 기강도 바로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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