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마광수 파문」…구중서씨의 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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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마광수씨의 『즐거운 사라』에 대한 문학평론가 구중서씨의 글을 싣는다. 본지 30일자(일부지방 31일자)에 게재된 마씨의 「위선적 도덕주의를 우려한다」는 제하의 주장에 이은 『즐거운 사라』에 대한 문학적 논의다. 구씨는 이 글에서 문학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강조했다. <편집자 주>
마광수씨의 한 편의 글이 「장편소설」이란 장르 표명을 붙여 『즐거운 사라』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에 대해 검찰이 「음란 표현물」로 규정하고 사법적 제재를 가하고 나섰다.
이 책의 작자는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가 『문단의 전문비평이나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지지 않는 것이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처사』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 제재를 가하는 것 말고도 같은 문단의 작가가 이 책에 대해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한 인간이 오류를 범했어도 오류와 오류를 범한 「인간」을 구별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지금 마씨에 대해 날아가고 있는 돌들에 한 개의 돌을 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과연 문학이 무엇이고 작가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너무도 아쉽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판단은 별개로 치더라도 「전문비평」의 판단은 과연 어떠해야 할까. 이 점은 사사로울 수 없는 문학담당자로서의 사명이다.
소설에 붙인 작가의 말을 보면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대생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중의하나』라 했다.
그런데 이 처녀 주인공은 성 유희에 있어 온갖 편력과 도착적 증세를 나열하고 있다. 삶의 형상화를 통한 문학 작품의 차원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 수준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표현에는 자유도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책임이 따르게 된다. 이것은 항구한 자연법적 진리다.
성에 관한 주제는 물론 문학세계에서 예부터 다루어져 왔다. 연애나 사랑의 양태는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 사망도 예술에선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가치의 창조와 구원이 없는 말초적 도취는 자기 고갈적 파탄에 떨어진다. 성의 주제는 지금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잘못 다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들은 거의 포르노에 연관되고 있다. 이러한 작태 때문에도 필자는 언급하기 싫은 이 촌평에 손을 대고 있다.
「성」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며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는 자연과 같은 삶의 일부다. 그런데 이것을 변태적으로 천박하게 나열한 것이 소설이요, 리얼리즘기법이라니…. 이런 것은 자연주의에도 못 미치며 그야말로 문학 이하다. 왜 개념에서부터 무지하며, 천박한 노출을 표현의 자유라고 감히 주장하는가. 이러한 사고의 수준으로 교단에서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상황도 문제다.
심하게 혐오감이 가도록 불결하고 문란한 여대생 주인공이 우리 주변에 흔히 있다는 판단도 결코 이 시대의 딸들에게 일치되는 전형이 아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언제나 건강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가장 참신한 문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병적인 지리멸렬의 폐해가 문학의 이름으로 엄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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