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성표현」의 한계|마광수소설 『즐거운 사라』의 외설시비를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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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예술이라는 형식이 등장하면서부터 성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예술 속의 성은 표현하기에 따라서, 혹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도, 가장 추악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문제는 예술가가 아무리 예술 혼을 쏟아 부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성을 승화시키려했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예술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한낱 외설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 경우 예술이냐 아니냐의 판정기준은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다.
그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법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가장 손쉬운 예로 꼽히는 것이 영국의 문호 DH 로렌스의 『무지개』『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두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영국법정에 의해 판금 조치되는 시련을 겪었다. 영국법정의 그 같은 결정은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 작품은 40년 가까이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읽히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문제가 된 것은 이들작품이 외설이냐 아니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같은 결정을 내린 법관들이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작품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외설물로 간주하여 판금조치를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불만이었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작품이 외설 여부를 가리기 위해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법에 의해 외설물로 판정되더라도 아마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거기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 성을 표현하는 문제는 단순히 예술가들 자신의 문제만으로 귀착되어야 하는가. 물론 사회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를 감안할 때 예술가들에게 있어서의「표현의 자유」가 무한정의 것일 수는 없다. 다만 법의 잣대에 의해 예술이 재단되는 경우 자칫 예술에 대한 억압의 형태로 발전할 우려가 있으며, 그것은 예술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도 있다.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문학 속에서의 성의 표현과 관련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세월의 흐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에 대한 가치관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50년대와 6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세대들은 문학을 통해 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문학 속의 성표현이 최초로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 60년대 중반의 일이었으니 그 방면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늦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성개방의 전세계적 풍조가 물밀 듯 밀려들어 오면서 문학작품 속의 성 표현도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지간한 정도면 청소년들조차 시큰둥해 할만큼 문학은 발빠른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마광수씨의 장편소설『즐거운 사라』는 지금 우리시대에 문학 속의 성표현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자는『이제껏 성에 대한 일체의 논의나 표현은 구태의연한 조선조식 윤리와 엉거주춤 양다리 걸치기식 눈치보기의 풍조 때문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로부터 한시바삐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이 소설이 내보이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표현의 단계적 과정이 철저히 무시된 채 한꺼번에 몇 단계층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문학이냐, 외설에 가까우냐 하는 것은 역시 읽는 사람의 문제일 수밖에 없겠으나 문학 속의 성표현이 제한 없이 치닫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소설이 하나의 모델로서 다각적인 검토가 시도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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