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화 로비에 놀아난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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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경찰청 수뇌부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은폐 또는 축소하려 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청 감찰 결과에 따르면 한화그룹 고문인 최기문 전 경찰청장의 청탁을 받은 서울청과 남대문 경찰서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수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경찰청은 어제 서울청 간부들과 남대문서장 등을 직위해제하고 징계키로 했다. 홍영기 서울경찰청장은 자진 사임했다.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꼽힐 만하다.

경찰청의 징계 조치가 있었지만 이대로 끝낼 일이 아니다.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수뇌부가 대기업의 로비를 받아 사건을 숨기려 한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오히려 경찰 내부의 정보 유출자를 색출하겠다고 펄펄 뛰었던 게 누구였던가. 경찰 수뇌부의 행동은 매우 조직적이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숨기려 했는지, 이택순 경찰청장은 정말 몰랐는지 의혹은 여전히 많다. 이 청장과 동문인 한화그룹 계열사 고문이 로비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돼 있다.

한화그룹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한화그룹과 경찰의 뒷거래설이 있더니, 최 전 청장을 통한 로비설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저께 남대문 경찰서 전 수사과장이 한 방송에서 한화 측 변호사가 사건을 무마해주면 평생을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한화 측이 부인하자 당사자는 하루 만에 외압이나 회유가 전혀 없었다고 번복하고는 사표를 냈다. 왜 그가 태도를 바꾸었는지 의아스럽다. 갈수록 의문 투성이다.

경찰의 공신력은 완전히 추락했다. 대기업에 휘둘려 편파 수사를 하는 경찰을 국민이 어떻게 믿겠는가. 경찰은 이번 기회에 환부를 완전히 도려내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듯, 사표 받거나 몇 사람 징계하는 선에서 끝내선 안 된다. 경찰도 검찰에 금품수수.외압 여부 등 수사를 의뢰키로 했다. 그러나 경찰 수뇌부의 수사방해도 중대한 범죄다. 검찰이 나서서 하루빨리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경찰을 만드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