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밀어내고 장막에 숨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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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건설교통부의 전 직원이 '청렴 나무'에 각자 이름을 쓴 명찰을 달았다. 지난해 청렴도 조사에서 건교부가 중앙 행정기관 중 꼴찌를 맴돈 오명에서 벗어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이 행사는 이튿날 각 언론에 '미담'기사로 소개됐다.

느닷없는 행사를 미심쩍게 여긴 본지 기자가 은밀히 취재에 나섰다. 평소 신뢰를 쌓은 공무원을 차례로 만났다. 몇 번 망설이던 한 공무원이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 감사팀 직원이 '설 떡값'을 받았다가 국무총리실 암행 감찰반에 적발됐다는 얘기였다. 그 뒤 부랴부랴 기획된 것이'청렴 나무' 행사였다.

본지 2월 15일자 3면의 '건교부가 청렴 나무 심은 까닭은'이라는 기사는 이렇게 나왔다. 건교부 기자실이 없었다면, 공무원과 대면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조잡한 이벤트 뒤에 숨겨진 어설픈 비리의 사연은 덮여졌을 것이다.

8월부터 건교부 기자실이 없어지고, 공무원 대면 취재가 금지된다. 정부가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강행한 것이다. 기자는 취재현장에서 내몰리고 정부의 치부는 두꺼운 장막 뒤로 숨게 된다. 브리핑실에서 공무원들이 공개적으로 '청렴 나무'를 심은 까닭을 고백할까. 국민은 주요 정책 뒤에 숨은 핵심 알맹이를 알기 어렵게 된다.

독자 제보로 시작된 본지의 '이과수 혁신 감사 출장' 보도도 마찬가지다. 감독권을 쥔 기획예산처는 정보 제공은커녕 "몰랐다. 책임 없다"고 발뺌만 했다. '예산처가 미리 알았다'는 보도가 나가자 그제야 "구두 보고는 받았다"고 물러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21일 '공직기강 재확립 간담회'도 두루뭉술한 내용만 공개됐다. 청와대가 공기업 감사들에게 "간담회 분위기조차 발설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심야에 참석자들을 일일이 면담 취재한 뒤에야 "당신들이 책임지시오"라는 강도 높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활자화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세금을 거두는 국세청과 예산을 배정하는 기획예산처는 언론의 감시망에서 벗어난다. 기자실마저 없앤다면, 국민이 모아준 세금으로 짠 예산을 낭비하는 것을 감시.비판하는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정부는 브리핑을 내실화하고 비공개 정보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자신들에게 부담이 될 민감한 내용을 자발적으로 털어놓겠느냐는 것이다. '1.31 부동산대책'의 핵심인 '비축용 임대주택'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재정경제부와 건교부 관계자들이 모여 정치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범사업을 강행하기로 합의한 뒤 회의 결과를 비밀에 부쳤다. 그 내용이 보도된 지 일주일 뒤에야 재경부는 사실을 시인했다. 흔히 보는 '뒷북 브리핑'이다. 과천의 한 고위 관료는 "각 부처의 브리핑 자율권부터 보장돼야 한다"며 "민감한 내용이 보도되면 즉각 청와대가 불호령을 내리는 판에 누가 소신 있게 브리핑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경민 기자

정부가 22일 발표한 기자실 개편안

▶ 기자실 통폐합

- 정부 중앙청사.과천청사.대전청사 세 곳으로 브리핑실 통폐합. 언론사별로 최대 4석 제공

- 청와대.국방부.금감위.검찰청.경찰청 브리핑실은 유지

- 6월 말 공사 착공해 8월 초부터 시행

▶ 취재 지원

- 전자브리핑 시스템 도입, 언론에 동영상 실시간 중계

- 질의.답변식 브리핑 진행

- 정보공개법 개정

▶ 취재 제한

- 모든 취재는 공보관실 경유

- 공무원 직접 취재 원칙적으로 불가

*취재 제한 방안은 이미 실시 중이라는 이유로 개편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음

*** 알려왔습니다

5월 23일자 1면 '기자 밀어내고 장막에 숨는 정부' 기사와 관련, 건설교통부는 "청렴나무에 이름달기 등 청렴실천결의대회 행사는 감사팀장의 설 떡값 수수 사건 이전부터 기획된 것으로 공교롭게도 사건 적발 이후에 행사가 열렸을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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