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후세인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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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이런 공상을 해 본다. 군복 차림의 사담 후세인이 자동소총을 들고 바그다드의 번화가, 자신의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났다. 열명 정도의 공화국 수비대 소속 정예군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를 알아 본 시민들이 순식간에 수천명 모여들었다. 어떤 시민들은 후세인의 등장에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하고 다른 시민들은 악마 후세인은 기헤너(이슬람의 지옥)로 가라고 소리 지른다.

소식을 듣고 출동한 미군 특수부대원 6백명이 주위를 포위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에서 후세인이 사자후를 토한다. "용감한 이라크 국민이여, 충성스러운 이라크의 전사(戰士)들이여, 알라의 신성한 이름으로 나를 따라 미 점령군을 몰아내는 성전(聖戰)에 참여하라!" 그렇게 말하면서 후세인은 자동소총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공포를 쏜다. 포위망을 좁혀 오던 미군 쪽에서 날아온 총탄 세발이 그의 왼쪽 가슴과 오른쪽 복부와 허벅지를 관통한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말을 계속한다. "알라의 이름으…." 그는 네발의 총탄을 가슴과 머리에 더 맞고 자신의 동상을 받치고 있던 좌대(座臺) 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뒀다.

이것이 기원전 579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위대한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자처하던 후세인의 최후였다면 그는 이라크인뿐 아니라 아랍인 모두의 가슴속에 영웅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자칭 아랍의 영웅은 농가의 토굴에서 초라한 몰골로 생포됐다. 그는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않았고 자살도 시도하지 않았다.

후세인이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같이 미 군의관이 시키는 대로 머리를 좌우로 돌리고 입을 크게 벌려 건강진단에 응하는 모습에 수많은 이라크인과 아랍인은 절망했을 것이다. 카이로의 영자신문 이집션 거제트 회장 사미르 라갑은 16일자의 칼럼에서 난공불락의 지하 요새가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후세인이 쥐구멍 같은 토굴에서 붙들린 모습을 한탄했다. "그의 전사들과 공화국 수비대는 어디 있는가? 그가 가까운 친척의 밀고로 덫에 걸린 쥐같이 붙잡힌 것은 굴욕적이다."

후세인 생포는 대선을 11개월 앞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횡재다. 만약 후세인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더라면 미국에 이라크는 머물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수렁이 될지도 모른다. 사자로 알았던 후세인은 고양이에 불과했다. 그는 테러의 배후가 아니라 비겁한 도망자였다. 공화국 수비대의 바그다드 포기는 전략이 아니었다.

부시는 후세인 재판을 최대한 이라크인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 일정을 대선에 맞춰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부시가 그런 욕심을 과도하게 부린다면 세계 여론과 이라크인들의 반감을 살 것이다. 후세인 검거가 자동적으로 이라크 문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점령정책의 종식과 주권이양을 앞당기라는 압력은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후세인 검거가 일부 이라크인들이 포기하지 않은 그의 복귀에 대한 기대를 날려버린 것은 이라크의 안정 회복에 큰 분수령이 될 것이다. 후세인을 잡고 보니 그가 테러 공격의 배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그가 테러 공격과 무관했다면 당분간 테러 공격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후세인 지지세력이 최후의 보루를 잃고 기세가 꺾인다면 테러와 게릴라 세력이 받을 심리적인 타격은 결정적일 것이다.

후세인이 붙잡힘으로써 말도 많은 이라크 파병을 목전에 둔 한국 정부가 정신적인 부담을 많이 덜게 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 생포는 테러 공격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라크의 잡다한 불만세력들의 구심점을 박탈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사미르 라갑이 기대하는 대로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장기 폭정을 말없이 감수했던 잘못을 미 점령군 거부운동으로 갚으려고 한다면 파병하는 나라들은 후세인 검거의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