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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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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기판에는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있다. 초(楚)와 한(漢)의 양 진영 중간을 가르는 선이다. 초의 패왕 항우(項羽)와 한의 유방(劉邦)이 서로 대치한 전쟁에서 유래한 장기는 이 중간선을 경계로 차(車)와 포(砲), 마(馬)와 졸(卒) 등의 패로 승부를 가른다.

중국의 졸은 한국 장기판의 그것처럼 후퇴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중간을 넘기 전까지는 좌우로 이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유는 그곳에 거대한 구덩이, '홍구(鴻溝)'가 존재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 선을 넘어야만 중국의 졸은 전진과 함께 옆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최초 통일 왕조인 진(秦)이 무너진 뒤 중원을 잡기 위해 나섰던 항우는 초반의 우세를 잃고 유방에게 쫓기는 입장이 됐다. 병력과 군량을 충분히 축적한 유방에 비해 항우는 그 부분이 부족했다. 사기도 떨어졌고 남쪽 고향으로 향하는 향수는 점차 깊어진다. 그래도 유방은 자신의 부친과 혈족을 포로로 잡은 항우를 칠 수가 없다.

홍구를 중심으로 초와 한이 동쪽과 서쪽을 서로 나눠 가지자는 제의는 이 대목에서 나온다. 힘이 떨어져 있던 초는 이 제의를 수락하고 유방의 친족들을 풀어준다. 후에 유방은 모략으로 초를 이긴 뒤 한조(漢朝)를 건립한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항우가 애첩 우희(虞姬)를 죽이고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고사는 매우 유명하다.

홍구는 중국 최초의 운하로 간주된다. 황하를 이용해 지금의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 부근을 연결한 인공 수로다. 폭이 넓은 곳은 800m에 달하고 깊이는 최대 30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기원전 361년으로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 연간이다. 천하의 패권을 가른 지역이라는 점에서 홍구에 대해 중국인이 지니는 느낌은 매우 크다.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곳, 나와 남의 관계가 끊긴 곳쯤으로 받아들인다.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야 늘 격렬할 터이지만 요즘 대선을 앞둔 한국의 정치인들이 파는 골과 웅덩이 모두 이 홍구에 못지않다. 내부 경선의 룰을 두고 한나라 대선 주자들은 극단의 분열상을 보인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 사이에도 그에 못잖은 신경전과 막말 공방이 벌어진다. 늘 반복되는 정치판의 현상이라고 봐 넘기기에는 뭔가 개운찮다. 지켜보는 국민의 식상한 느낌이 홍구 못지않게 넓고 깊어간다. 이 구덩이를 메우고 나서야 정치도 있을 터인데.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