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시간 질질 끄는 북한의 나쁜 습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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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베 총리가 북핵 해결을 위한 2.13 합의에 부정적이고,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에 묶인 북한 자금을 전액 돌려주기로 했다는 소식에 화를 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베는 이날 백악관에서 부시와 따로 만나 북한에 대해 좀 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2.13 합의에서 정한 60일 기한을 훌쩍 넘긴 이날 부시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우리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 지도자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겐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단이 있다. 우리는 추가 제재를 할 능력이 있고 다른 국가들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라고 설득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에서는 몇 달이 아닌 몇 주 이내에 북한의 가시적 조치가 없을 경우 부시 대통령이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대북 강경파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부시의 2.13 합의에 못마땅해 했다. 필자를 포함한 중도 보수파들은 당초 2.13 합의를 지지했었다. 그러나 미국이 3월 동결된 북한 자금을 조건 없이 돌려준다고 발표했을 땐 경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올 여름이면 이 같은 비판 여론은 의회와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 진영까지 퍼지게 될 것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레임덕에 빠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진을 빼는 나쁜 습관이 있다. 1991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아널드 캔터 미 국무차관과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의 대화를 가졌지만 북한은 시간을 질질 끌고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99년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로드맵(페리 프로세스)을 제시했지만 평양은 그때도 너무 재다가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기회를 놓쳐 버렸다. 지금도 평양은 시간을 끄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내심 이라크전 때문에 인기가 떨어진 공화당 대신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좀 더 유연한 대북정책이 등장할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북한은 미 국내 정치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부시는 2.13합의를 위해 너무 많이 양보했다. 만약 북한이 이번에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2009년 이후 보다 유연한 대북 접근을 하기 힘들 것이다. 현재 북한은 미국이 BDA 자금 계좌 이체를 도와줘 국제 금융시스템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끔 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BDA 논의를 둘러싼 그간의 과정을 살펴 보면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과거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만약 북한이 이번 합의를 깔아뭉갠다면 앞으로는 어떤 미국 대통령도 북한과 2.13 수준의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은 2008년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베트남전 이후로 안보 문제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의식해 4월 25일 민주당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모든 후보들은 안보문제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부시 행정부와 거래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 만일 북한 수뇌부가 지금 열린 역사적 기회를 놓칠 경우 평양은 앞으로 상당기간 허송해야 할지 모른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의 손을 잡을 준비가 돼 있다. 북한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은 이 같은 미국의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해야 한다.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정리=최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