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온 고향찾기 융통성을/박의준 통일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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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친이 살아 계신다면 이미 1백세가 넘었을 텐데…,혹시 무덤이라도 가볼 수 없겠습니까』 『이북에 처를 두고 내려와 수많은 세월을 기다리다 재혼했습니다. 우리 할멈(새부인)도 양해했으니 북한에 있는 할망구를 만나도 되지 않겠소』 『지금까지는 이북이 믿기지 않아 방북신청을 하지 않았는데,이미 신청한 사람 가운데서만 뽑는다니 난 북에 남겨둔 가족을 끝내 못만나고 눈을 감으란 말입니까』­.
구구절절 단장을 녹이는 이 사연들은 「두고온 고향」을 다시 밟고 싶어하는 이산가족들의 애틋한 목소리로 신문사에 하소연해오는 내용중의 일부다.
남북한이 오는 8월15일을 전후해 이산가족 1백명을 교환방문케 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보도된지도 1주일이 다됐건만 북녘땅을 향한 실향민들의 열기는 갈수록 끈끈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남북관계가 급진전되지 않는한 7년만에 재개되는 이산가족교류도 「1회용」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내가 꼭 북한땅을 밟아 평생 소원을 이뤄야겠다』는 실향민들이 수없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이들은 언론에 방북조사단 선정기준과 관련된 내용이 단한줄만 보도돼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진짜냐,확정된 기준이냐」며 다그쳐 묻는다.
심지어 어떤 실향민은 『그 누군들 한맺힌 사연을 갖고 있지 않겠어요. 그런 만큼 정부가 임의적인 기준을 만들어 「누군 가라,누군 가지마라」하는 식으로 나서서는 안된다』며 『차라리 순위를 매겨 공정하게 컴퓨터로 추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또 일부에서는 과거의 전력을 문제삼아 남북한 당국이 방문단에서 일찌감치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민군 출신의 한 귀순자(65)는 『이북에서 「야 이놈,반동이구나」하며 명단에서 제외하면 두고온 처자는 어떻게 만나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남북한이 과연 이런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남북한은 모처럼만의 기회이니만큼 너무 정치적인 굴레에 얽매이지 말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산가족 방문단을 짜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한맺힌 이산자들에게 고향을 찾을 기회를 더 늘려주고 상호방문을 정례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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