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도청·성향조사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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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야운동가 김희선씨와 김응권씨 집 전화선로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되었는가 하면 경남 경찰청은 산하 6개 경찰서에 공무원들의 정치성향을 파악,보도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시계는 과연 몇시인가를 자문해 보게 된다. 6공들어 부분적이나마 민주화가 이룩되었다고 인정하고 싶다가도 이런 사건들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안이한 판단이었던가 하고 생각을 고쳐 먹게 된다. 적어도 권력기관에 관한한 「민주화」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수사시관에 의한 도청말썽은 6·29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재야단체나 재야인사들에 대한 도청말썽은 제쳐놓고서라도 우리는 지난 90년 4월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이 자신의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공작정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사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바로 지난 14대 총선에서도 경남 울산 동부경찰서소속 경찰관이 국민당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물의가 일기도 했다.
도청이 분명히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전기통신 사업법·전파관리법에도 어긋나는 위법행위임에도 좀처럼 그것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위 아래 할 것이 없이 정보수사기관 종사자들이 그것에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허다한 도청사건이 일어났으나 한번도 그로 해서 해당자가 제대로 문책을 당한 사례가 없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도청행위는 성격상 그 행위자를 밝혀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궁극적인 근절책은 수사·정보기관 책임자들의 민주의식과 양식,그리고 도덕성에서 구할 수 밖에는 없다. 민주주의는 바로 절차의 윤리다. 설사 목적이 바람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수단이 그릇된 것이라면 불법적인 것이며 반민주적인 것이라는 인식아래 그 책임자들이 오랜 악습인 도청이란 수사관행을 타파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설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경찰의 공무원 정치성향조사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공무원 사회를 여당의 표밭화하고 아예 행정조직까지 동원하여 여당의 선거운동에 나서온 것이 우리의 정치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화」를 표방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그러한 관행을 아무런 죄의식없이 공공연히 지속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시대역행적인 행위다.
경찰은 기회있을때마다 수사권의 독립을 요구해왔는데 이렇듯 스스로 권력의 시녀임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런 요구가 가당한 것인지 묻고 싶다.
지난 시대의 망령을 다시 대하는 듯한 도청과 공무원 성향조사가 더 이상은 없으리라는 것을 국민에게 확신시키려면 우선 그 행위자와 책임자에 대한 엄한 문책부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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