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대학시절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등록금을 벌었다. 그는 "남들은 연주자의 길이 화려하다고하지만 나 같은 '자수성가형'도 있다"며 웃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1961년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는게 김 교수의 회상이다. 7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지만 중간에 악기를 잡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한국 전쟁과 가난 때문이었다.
"대학에 간 이후로 한 번도 집에 손 벌려본 적이 없다"는 김 교수는 "대학 입학 이후 독일 유학 시절까지도 아르바이트 레슨은 늘 일과 중 하나였다"고 했다. 힘들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당시 국민학생 이성주에게 김 교수는 정식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을 지도해주는 대학생 연습 선생님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르바이트 시절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영광"이라며 웃었다.
"선생님이 워낙 유쾌하셔서 집에 오실 때만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고 이 교수가 옛 추억을 떠올리자 김교수는 "걸어다니느라 레슨 시간에 항상 늦어서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아니냐"며 농담으로 받았다.
김 교수는 당시 남산에 있는 이 교수의 집까지 걸어다니며 레슨을 했다고 한다. "바이올린을 들고 학생들의 집을 다 '순회'하고 나면 밤 12시가 넘었다"며 "이렇게 가르친 학생들이 100명쯤 될 것"이라고 반추했다. 조영미(52.연세대), 최한원(54.이화여대) 교수도 당시 대학생 김민이 가르쳤던 '숨은 제자'들이다.
이 교수는 "어린 아이들이 바이올린을 연습할 때 옆에 붙어서 잡아주는 게 큰 도움이 된다"며 "당시 아주 꼼꼼하고 날카롭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어른이 돼서 연주할 때도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주자 등용문으로 유명한 뉴욕의 '영 아티스트 콘서트'에서 전문 연주자에서 출발한 이 교수는 현재 탄탄한 연주력을 인정받는 바이올리니스트다.
이달은 두 바이올리니스트 모두에게 특별한 달이다. 김 교수는 정년퇴임에 즈음해, 이 교수는 뉴욕 무대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각각 독주회를 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25일, 이 교수는 4~5월 전국 순회 연주를 연다. 이 교수의 서울 연주는 19일이어서 옛 사제가 일주일 간격으로 무대에 오르는 셈이 됐다. 두 연주자가 공통으로 연주하는 곡(프로코피예프 소나타 2번)도 있어 흥미롭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