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줏대잃은 한은/심상복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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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때보다 중립성이 요구되는 선거철에 중앙은행이 줏대를 잃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민간기업의 부도문제에 깊숙히 간여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금리인하가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불쑥 내놓는등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행동이 잦다.
지난 한주 한국은행은 여성 의류업체 논노를 둘러싸고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매출부진과 부동산투자로 자금이 묶인 이 회사가 위기에 몰리자 한은 은행감독원은 거래은행에 「부도는 곤란하다」는 정치권의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충실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50대그룹에도 속하지 않아 은행감독원이 나설만한 사안이 아닌데 이렇게 요란법석을 떤 것은 정부측의 종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논노가 현정치권의 실세와 상당한 친분을 가진 연고로 재무부가 한은을 통해 자금지원을 해주라는 지시가 있은 것으로 안다』고 실토했다. 때가 선거철인만큼 상장사의 부도와 그로인한 관련 투자자들의 손실 및 증시에의 악영향도 고려되었음직 하다.
기업의 부도는 거래은행이 판단할 문제라고 늘 강조해온 한은은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법으로 부도를 유보시키는 법정관리전까지는 긴급자금을 봐주라고 관련 은행에 지시했다. 물론 이 일은 대부분 정부의 뜻대로 지난주말 일단락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은행은 16일 금리인하(당좌대출 0.25%포인트등)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며,아직 금리를 내리지 않은 은행은 언제쯤 금리를 낮출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자유화된 금리조정문제는 순전히 해당은행이 정할 사안이기 때문에 진행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던 한은이 지금에 와서는 금리를 내리지 않은 은행에 대해서까지 인하계획을 상세히 파악해 자료로 내놓는 적극적인 홍보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금리인하가 은행자율에 의한 것이었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당면 현안인 물가·국제수지문제와 씨름해도 시간이 모자랄 한국은행마저 엉뚱한 일에 정성을 쏟아야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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