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여론재판(잇단선거 고민하는 재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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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민표의식 툭하면 「동네북」/자금흐름 왜곡·물가상승 압력등 큰 걱정/기업들 “네차례선거 치를 생각하면 아득”
얼마전 대한상의주최로 열린 한 행사에서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은 『내년을 생각하면 막막하기 짝이 없다』고 토로했다.
『87,88년 선거때는 경기나 좋았지요.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고 내년전망은 더 어두운데 네차례 선거를 치를 생각을 하면 정말 아뜩하다』는 어느 그룹 젊은 오너의 얘기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이같은 얘기는 재계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재계가 선거의 구체적 폐해로 지적하는 것은 자금흐름의 왜곡과 물가상승압력,그리고 인력난이다.
그러나 사실 선거를 앞두고 재계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자금·인력보다는 「가진자」,특히 대기업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의 확산이다.
유창순 전경련회장이 『돈많은 사람이나 기업에 대해 좋지않은 대중의 감정에 맞춰 정책을 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나선것도 앞으로 닥쳐올 「기업수난」에 대한 위기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그룹오너는 『재벌기업은 제사상에 오르는 돼지머리와 같다』고 자조섞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선거철이나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운 대목이 되면 여론무마용 「돼지머리」로 재벌기업이 제상에 올려져왔고 내년에는 그 정도가 여느때와는 다르리란 예감이 재계에 짙게 깔려있다.
『87년 선거때까지만 해도 문어발식 경영이니,금융독식이니하는 표면적인 문제를 들추는데 그쳤다고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소유·경영의 분리다,부의 세습차단이다 해서 내용이 보다 본질적인 부분으로 바뀌고 있는 느낌이고 정부 역시 여론을 등에 업고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기세아닙니까』라는 경제단체 한 임원의 얘기다.
『대기업이 잘못한게 많았다 해요. 그렇다해서 경제발전 과정에서 기여한 부분도 적잖은데 이런 것은 보려고들질 않아요. 여든 야든 재벌을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으기 위한 「동네북」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면서도 손은 손대로 벌리고….』
『결국 돈주고 매맞는 격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업이 나서 해결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예요. 정권말기의 정부를 기대할 수도 없고,「비상」이긴한데 방법이 없어요. 그냥 견디는 거지요.』
일방적으로 매도당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보기 위해 재계핵심부에서 한때 자구책으로 재계인사들을 대거 정계로 진출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방안이 『여론의 호응을 얻기는 커녕 「도둑당」쯤으로 몰려 여론만 악화시킬 것이란 판단때문에 백지화 했다』고 이와 관련됐던 한 경제단체의 임원은 씁쓰레하게 말했다.
재계 스스로도 「정경유착」으로 표현되는 개발이익의 독식에 따른 기업비판여론을 알고있으며 이같은 곱지않는 눈길이 사라지지 않는한 재벌매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시도 또한 사그라들 수 없다는 점을 알고있다.
전경련이 서울·부산·광주 등을 돌며 지역인사등을 초청,「재벌문제」를 중심으로 토론을 벌이겠다고 나선 것도 선거를 앞둔 재계의 이같은 고민을 반영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재계는 재계이익의 확보가 최우선과제고,따라서 그들이 내세우는 「선거폐해론」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경제력집중은 그동안 경제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폐해의 집적이며 이는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재계는 여론과 인기발언을 탓하기전에 스스로 이같은 문제를 해소해나가려는 자기성찰의 노력을 앞세워야 한다.
경제력집중등 재벌의 폐해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선거과정에서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이뤄져 엉뚱한 혼란만 가중시키곤 잊어버릴 성질의 문제가 아니며 평소에 따지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필요로하는 훨씬 중요한 과제며 시정목표가 돼야한다.<박신옥·오체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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