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스러져 가는 '학생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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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도심이 오랜만에 대학생들의 시위 물결에 파묻혔다. 지난달 27일엔 베를린자유대.베를린공과대학과 훔볼트대학 소속 대학생 2만여명이 강의실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지난 주말에도 1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에 집결, 운터덴 린덴대로를 따라 시청사까지 현수막과 피켓을 앞세우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대학생들은 베를린 시정을 맡고 있는 사민당(SPD)과 민사당(PDS) 당사를 기습적으로 수차례 무단점거하는 등 시위 양상도 30년 전의 과격성향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시위 명분은 완전히 다르다. 68세대는 사회주의에 심취해 "친아버지를 죽인다는 각오로 기존 질서를 전복해야 한다"며 기성세대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등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반면 현재 독일 대학생들은 대학에 대한 예산삭감과 복지축소에 항의하며 생계형(?)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다. 그간 독일의 대학은 완벽한 복지혜택을 보장해 주었다. 대학 등록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비 장기저리 융자, 차비 등 공공요금의 할인, 아르바이트시 소득세 면제, 문화행사 할인 등 대학생들은 다양한 특권을 누려 왔다. 그러나 통일 이후 적자살림에 몸살을 앓고 있는 독일 정부는 성역으로 치부되던 교육예산에도 칼날을 들이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특히 독일 최대의 대학도시인 베를린은 지난 10여년간 교수진이 30% 이상 감원되고 학과가 통폐합되는 등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옛날 대학생은 공부밖에 걱정할 게 없을 만큼 팔자가 편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오늘날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투쟁의 나날이지요."

아르바이트 시간에 쫓겨 농성장을 급히 빠져나가며 뇌까리는 한 여학생의 신세타령에서 독일의 '학생천국' 이미지는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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