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못만난 DJ사정/정순균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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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엔참석과 소련·폴란드·독일 등 3개국 순방길에 나선 김대중 민주당대표는 첫 방문지인 소련에서의 공식일정(5박6일)을 모두 마치고 23일 오전(한국시간)뉴욕에 도착했다.
김대표는 소련체류동안 당초 목표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옆사람이 지켜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무진 노력했으나 끝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같은 결과는 고르바초프 제주방한때 우리측이 익히 겪었던 경험 즉,도착시간을 멋대로 몇번이고 변경했던 소련측의 불가측성과 소련내부의 정정불안,옐친의 갑작스런 심장병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배경에는 김대표측이 사전에 치밀하지 못하게 준비한 점과 야당외교에 대한 우리정부측의 「비협조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측은 지난 8월말 교섭선발대를 소련에 파견,접촉결과 외무부차관과 러시아공의전실장으로부터 고르바초프,옐친과의 면담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 유엔총회 개회전인 9월20일이전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 붙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김대표는 루츠코이 러시아공부통령,셰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등 20여명의 고위당국자들을 만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선은 쿠데타직후 불안한 정정에도 불구,굳이 두 대통령과의 면담을 목표로 했던 것이 다소 무리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두 대통령이 한국의 야당지도자를 만나기에는 아직은 경황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소련인들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못한 민주당측의 치밀하지 못함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표의 면담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김대표의 해외순방을 적극 협조하겠다』는 우리정부의 당초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민주당측의 불만이다.
소련주재 우리공관은 김대표의 면담주선협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눈에 보인 듯 했다.
이 때문에 김대표가 무명용사묘지헌화때는 의장병이 마련되지 않아 붉은 광장을 지키는 경비경찰 2명을 의장병으로 급조해 의식을 치러야 했다.
단일야당출범과,노대통령주최 유엔가입 경축리셉션에 김대표의 불참이 정부측의 비협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민주당측의 주장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도 정부당국은 김대표의 남은 일정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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