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신임투표로 표절 감출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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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려대에서 어제 이필상 총장의 신임을 묻는 교수 투표가 시작돼 오늘까지 계속된다. 논문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이 총장이 며칠 전 제안한 데 따른 것이다. 이 총장은 투표 결과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임투표는 이번 사태의 본질과 무관하다. 투표 결과에 관계없이 이 총장은 표절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지율이 높을 경우 논문 문제를 넘어갈 수 있다고 계산했다면 엄청난 오산이다. 그것은 본인은 물론 고려대를 더욱 진흙 구덩이로 몰아넣는 악수(惡手)다.

고려대는 이번 사태로 이미 난장판이 됐다. 몇 달 전 이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이 드러난 이후 교수사회는 편 가르기식으로 양분됐다. 이 총장은 취임 전에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하는 등 총장 직선제의 추악한 이면도 드러났다. 대학 이사회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명문 사학의 명예는 추락하고 있다.

이 총장은 지난해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논문 표절 문제가 불거지자, 표절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행동은 어떤가. 처음에는 표절이 아니다, 관행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다 교수의회 진상조사위원회가 표절 사실을 밝혀내자 음모론을 제기하더니 학칙에도 없는 신임투표를 제안했다. 이는 표절 문제를 편 가르기로 은폐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대표한다는 대학총장이 정치적 포퓰리즘을 이용하는 것이 올바른가.

이 총장은 이미 지도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학문적 윤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양심에 대해 더욱 엄격해야 한다. 그런데 만신창이가 된 이 총장을 누가 존경하고 따를 건지 의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동료 교수나 학생들에게 학문적 윤리를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투표를 거부한 교수들도 많았다. 이들의 퇴진 요구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고려대는 한층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 총장은 자신과 고려대를 위해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