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제 식구 명단은 숨긴 과거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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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30일 서울 필동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 상임.비상임 위원 9명은 임시 전원위원회에 참석해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의 판결에 참여한 판사 이름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사회에 과거사 논쟁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이 이 같은 결정을 했는지 궁금했다. 모두 15명의 위원 중 불참한 6명은 누구인지도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회의가 끝난 뒤 "참석한 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개 형식으로 진행된 재판의 판사 명단을 비공개하는 것이 더 비정상적"이라며 판사 실명 공개를 강행한 위원회가 내부 위원 명단은 비밀에 부친 것이다.

과거사위의 존립 근거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장 13조에는 위원회의 의사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과거사위는 그동안 2주마다 열린 전원위원회의 참석자.안건 등을 홈페이지에 올려왔다. 하지만 이날 과거사위의 입장은 분명했다. "참석위원 9명의 만장일치로 결정됐기 때문에 명단 공개의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명단이 공개되면 위원들의 이념 성향.추천(대통령.국회.대법원장) 등을 분석해 정치적 해석이 나올까 우려된다"며 속내를 내비쳤다.

과거사위는 이날 보안에 크게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평소 출입이 자유롭던 위원실의 문은 굳게 닫혔다. 회의 뒤 원칙적인 입장만을 적은 성명서를 내놓고 직원들에겐 기자와의 접촉을 피하라며 입단속을 당부했다. 위원들도 "공식적으로 내놓은 성명서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참석한 위원들의 이름이 공개되면 위원 개인의 결정인 것처럼 비춰질 위험이 있다"며 "파장을 줄이고 참뜻을 전달하기 위해 참석자를 비공개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과거사위는 위원들의 명단이 공개될 경우 그 파장을 우려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위원 명단 비공개'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긴급조치 판결 판사'의 실명 공개에 따른 후유증과 부작용도 고려했어야 한다. 30년 전 긴급조치 사건을 배당받아 재판한 판사들의 실명까지 공개하면서 자신들의 의결 과정은 감추려는 과거사위의 행태는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김호정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