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위 '긴급조치 판사' 실명 공개 여부 오늘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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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법원은 29일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현 정권보다는 차기 정권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가 1970년대 긴급조치 판결에 관여한 판사의 실명을 공개키로 한 방침에 대해서다. <본지 1월 29일자 10면>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은 이날 "(사법부 과거사 정리를) 정치적 악용의 소지가 있을 때 하기는 어렵다"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이 일로 사법부 내부의 과거사 정리 논란이 증폭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실장은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직후부터 그해 12월까지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맡았던 핵심 측근이다. 그는 이 대법원장의 지시로 2005년 9월부터 긴급조치법.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사건 6500여 건의 판결문을 수집.분석했다. 현재 사법부 과거사 정리작업을 책임지고 있다.

변현철 대법원 공보관은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작업은 사법부를 놓고 편가르기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거론되는 판사 누군가=과거사위에 따르면 긴급조치 판결에 관련된 판사들은 모두 400여 명이다. 이 중 현직에 있는 법관은 대법관 3명, 헌법재판관 3명, 서울지역 법원장,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 등 20여 명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직 대법관 A씨의 경우 78년 서울 영등포지원 판사 시절 1심 재판에서 취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기소된 시민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에 배석했다.

퇴임자 가운데는 70년대 이후 대법원장 8명과 역대 헌재소장 2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당시는 실정법 아래서 행해진 판결"이라며 "판사 실명 공개로 또 하나의 탁류가 형성되고 정치적으로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사위는 당초 이번주 중 판사 명단을 공개할 방침이었으나 "명단 공개는 포퓰리즘"이란 비판이 제기되자 30일 전원위원회를 열어 명단 공개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대법원, 왜 반대하나=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이 대법원장의 취임과 함께 공언한 사법개혁의 한 축이다. 이 대법원장은 유신과 군사정권 시절의 판결문 6500여 건을 수집.분석하도록 지시, 6개월 만인 지난해 3월 1차 분석작업을 마칠 정도로 독려했다. 대법원 내부에선 ▶70년대 긴급조치 상황 등에서 내려진 일부 판결을 무효화하는 특별법 제정▶재심 청구 범위를 확대하는 특별법 제정▶법원 차원의 과거사 정리기구를 만들어 판결 경위 등을 조사하는 방안이 논의돼 왔다.

하지만 "과거사 정리작업이 노무현 정부와 코드 맞추기로 진행되고 있다"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흔들 수 있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면서 주춤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익명을 요구한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노 정부 하에서 과거사 정리를 본격화한다면 '노 대통령과 코드 맞추기'라는 지적이 나올 것"이라며 "이런 성향 논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차기 정권에서 해야 한다는 게 이 대법원장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최근 제기된 이 대법원장의 변호사 시절 비위 의혹도 과거사 정리작업의 추진력을 약화시킨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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