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남편생활백서] 꼼짝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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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는 직업을 잘못 택한 것 같다. 아내는 누구를 가르치기보다 신문하는 것을 더 잘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명탐정이다. 아이들이 하는 거짓말은 언제나 아내의 신문 앞에서 들통난다. 아내는 냄새를 잘 맡고 눈썰미가 좋다. 집안의 물건이 조금만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아도 추리를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잡는다.

가령 아내는 책상만 보고도 아이가 학원에 늦게 간 사실을 안다. 식탁과 부엌, 냉장고를 열어보면 아이가 친구들을 몇 명이나 데리고 와서 놀았는지 숫자까지 맞힌다. 아이들이 늦게 들어오면 PC방에서 놀다 온 것인지, 노래방에서 놀다 온 것인지 아이들 옷에서 나는 냄새와 아이들 눈의 충혈 정도만 보고도 아내는 알아챈다. "왜 이렇게 늦었니?"라고 아내가 묻는 것은 아이들에게 정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이의 거짓말을 안다. 아이의 눈빛과 목소리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챈다. 아이의 얼굴을 어머니보다 더 자주, 더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내는 남편의 속임수도 안다. 남편의 눈빛과 목소리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다. 남편의 얼굴을 자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 자체를 더 좋아한다. 책 욕심이 지나쳐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다. 나는 신문 북섹션을 찾아 읽고 틈만 나면 서점에 들른다. 책이 사랑스러워서 박은옥이 부른 '양단 몇 마름'처럼 쳐다보고 만져보고 쓰다듬어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만 사버리는데 그 책을 집에 가져와 숨기는 일이 '미션 임파서블' 같다. 들키면 아내에게 혼날 테니 나는 새로 산 책을 아내 몰래 책장에 꽂아둔다. 우리집 책장에는 책이 많은 편이라서 새 책이 몇 권 꽂혀 있어도 그걸 발견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걸 귀신같이 찾아낸다. 아내가 누구인가. 명탐정 김성희다. "또 책 샀어?"

책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술이다. 나는 퇴근할 때 사당에서 지하철을 버스로 갈아타는데 거기 단골로 가는 '부산오뎅집'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 틈으로 비좁게 끼여 앉는 자리맛도 좋거니와 그 집 어묵 맛과 국물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게다가 주로 혼자 마시기 때문에 정말 '딱 한잔'만 마시고 언제든 일어서 집으로 올 수 있다. 나는 회사에서 바로 퇴근한 것처럼 "아, 피곤해"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아내를 속일 수는 없다. 아내가 누구인가. 명탐정 김성희다.

"또 술 마셨어?" 아내는 다른 사람의 변화도 잘 알아챈다. 가령 어느 탤런트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도, 어느 가수가 살짝 코를 세운 사실도 아내는 한눈에 알아맞힌다. 나는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데 말이다.

"저 가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네."

"원래 저 머리 아니었나?"

"잘 봐. 커트가 다르잖아?" 그때 명탐정 아내는 못 보았지만 술과 책을 좋아하는 주책 남편은 오늘 자른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 머리 아예 삭발할까 봐."

김상득 듀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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