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끝에 실정법 존중 결정/가톨릭의 강씨 자진출두 권유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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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계속 보호하면 법질서 무시” 이유/부담 큰 공권력투입 강행 미지수
가톨릭이 12일 김기설씨 유서대필용의자 강기훈씨(27)에 대해 조속한 시일내에 검찰에 자진출두하도록 권유키로 결정함으로써 김기설씨 유서대필사건을 둘러싼 강씨문제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가톨릭공식기구인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논의와 김추기경의 추인을 받은 이날 결정이 동시에 공정한 재판과 수사의 촉구,강씨의 인권보호를 위한 변호인단 구성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가톨릭이 어느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고심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실정법과 공권력의 권위를 존중해야 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데다 강씨등의 성당도피를 더이상 종교법상의 긴급피난으로 볼 수 없다는 내부여론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평위회의는 최근 강씨와 전민련으로부터 결백을 호소하며 공개수사주선을 요청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12일 오후 2시와 4시30분 두차례에 걸쳐 열렸다.
정평위는 이에 앞서 김추기경 지시에 따라 진상조사소위(위원장 최용록 신부)를 구성,진상조사소위가 12일 강씨와 전민련 서준식 인권위원장을 불러 사건설명을 들은뒤 이같은 결정을 내려 추기경의 추인을 받은 것이다.
결정의 핵심은 강씨와 전민련측이 요청한 강씨 신변보호문제에 대해 계속 보호할 경우 법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이유로 수용불가입장을 밝힌 대목이다.
정평위회의결과를 발표한 경갑실 명동성당 수석보좌신부는 이 부분에 대해 『15일까지로 예정된 대책회의·관계자 철수와 함께 강씨도 자진출두할 것으로 본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 발언을 했다.
그는 또 성당내 공권력투입에 대한 반대의사도 분명히 했지만 대책회의가 약속했던 15일을 넘길 경우 공권력투입을 막을 명분이 없어 대책회의 관계자들의 신변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밝혔다.
경신부는 또 『강씨의 유·무죄에 교회가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유서대필부분에 심증을 갖고 있다』고 말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명동성당측은 당초 강씨가 대책회의 철수와 동시에 성당에서 나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장기은신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자 서둘러 입장을 정리했다는 후문이다.
김추기경과 성당측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전민련 및 강씨는 이같은 발표에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전민련 서준식 인권위원장은 12일 오후 『강씨의 자진출두는 20일 광역선거를 앞두고 검찰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다』며 가톨릭의 권유에 응하지 않을 생각임을 분명히 했었다.
대책회의는 성당측의 통보를 받은뒤인 12일 저녁부터 철야회의를 가진끝에 가톨릭의 권유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고 강씨는 물론 대책회의관계자들도 20일까지 성당에 남아있기로 일단 결정했다.
한편 이날 결정이 가톨릭공식기구인 정평위의 논의와 추기경의 추인을 거친 공식입장이지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어 추진과정에서 가톨릭의 분열상이 표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과거 부천서성고문사건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전례를 들어 검찰의 조작수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사제단은 김기설씨의 여자친구인 홍모양의 공개증언,강씨에 대한 제3의 장소에서의 공개 수사등을 중재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이를 「교회의 월권행위」로 간주하는 정평위와 정면대결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가톨릭이 15일이후에는 공권력투입을 막을 명분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대책회의와 강씨가 적어도 20일까지는 철수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공권력투입의 가능성도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경찰도 내심 성당에 대한 공권력투입을 부담스러워 하는데다 자칫 또다른 「사고」가 생길 경우를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공권력투입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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