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놀음 선거 멍드는 경제/최철주 경제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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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년 이맘땐가 대통령이 서울의 한 시장을 둘러보고 있을때 물가가 너무 오른데 화가 난듯한 한 주부가 『대통령을 만나려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그 뿐인가. 어떤 주부는 『전세보증금 3천만원을 빌려달라』고까지 했다.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생활의 어려움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게 됐구나 하고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정부가 관계장관들에게 자리를 걸고 물가를 잡으라고 법석댔고 전·월세값이 턱없이 뛰자 은행들에는 필요한 자금을 서민들에게 융통해 주도록 조치를 취한 때였다는 것을 눈여겨 본다면 이제 국민들도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약속한 사항은 어떤 형태로든 받아내야 하겠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최근 광역의회 후보자들의 등록이 시작되면서부터 정부·여당의 많은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규모 주택건설계획,농어촌 구조개선 촉진계획,농수산물 유통구조 개선계획,사회간접시설 공기단축 방안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책자료들은 장관기자회견이나 간담회 형식으로 언론에 계속 배포되고 있다.
어떤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토돼온 사항이었으나 합리성이나 효율성등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분히 「선거용」으로 서둘러 내놓았다는 의심점이 강하다. 또 어떤 것은 『우리 부서에서도 이런 자료를 내놓았노라』고 기록에 남기기 위한 수준미달의 내용도 끼여 있다.
때마침 광역의회 후보자들은 「농산물시장 개방확대 반대」를 부르짖으며 숱한 지역발전 사업들을 경쟁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한 후보가 하천 복개공사를 공약하면 다른 후보는 농산물 도매시장 건설을 외친다.
선거는 정치적인 행사이지만 유세를 통해 표를 몰아오고 선거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 잔치가 경제적인 내용으로 치장될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정책도 거개가 무슨 무슨사업 위주이며 선거형세가 여의치 않다 싶으면 판세를 돌려잡는데 돈 놀음이 그만이라는 것이다. 여·야당이 당세확장비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을 뿌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정부·여당은 불과 며칠전에 『3·26 기초의회선거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깨끗한 선거가 됐다. 그 선거때 현금통화가 오히려 2천4백억원 줄어들었다』고 자랑했다. 신민당은 『물가폭등으로 경제질서가 붕괴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더러 긴급 물가종합대책을 세우라고 닦달하지 않았던가.
최근에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지불준비금을 예치하지 못한 3개 은행에 과태료를 물리는 무거운 벌을 내렸다.
해당은행으로선 신용이 땅에 떨어지는 치명적인 것이다. 기업의 돈가뭄이 심하다 하더라도 선거를 전후해 돈이 풀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창구를 죄는 수밖에 없다는 한은의 입장이다.
그동안 정부가 잔뜩 겁을 냈던 물가도 어느 정도 잡혀가고 주택가격도 소폭하락세로 돌아서 6공의 중간 성적표에 집어넣을 「자랑거리」가 생기나했더니 선거 돈놀음으로 이것저것 다 깽판이 될성 싶다.
이제 증권시장에서마저 또 정부의 부양책을 목타게 기다리고 있다.
선거때가 됐는데도 증권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겠지 하고 벼르고 있다. 정부가 증시에 돈을 풀었다 하면 한탕하고 돌아설 꾼들의 압력도 거세다. 증시부양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정부가 정치적 판단으로 서툰 증시회생의 묘안을 찾는다면 89년 12·12조치 이상의 참담한 실패와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게 뻔하다.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의 의지와 야당총재의 공언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느냐에 따라 우리사회 갈등의 구조가 개선되거나 아니면 더 악화되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광역의회선거가 금권타락으로 파장이 나면 다음에 있을 총선거와 대통령선거 양상은 보나마나다. 어차피 정권을 향한 이판사판의 싸움이 벌어질 것인 만큼 거액 살포에 따른 물가상승과 부동산 투기바람이 또 한차례 불 것이다. 투기대열에 빠진 사람들은 또 더 억울해 할 것이다.
후보들마다 지방개발사업을 공약사업으로 내걸고 혹은 업자들과 모종의 밀담을 거쳐 특정지역 개발을 촉진,땅값을 부추기는 일이 재연될 것임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지난번 국회의원 및 대통령선거때의 「열풍」이 작년·재작년 부동산 폭등의 공범이었다는 것을 정치권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고서도 정치권이 물가폭등·부동산 투기문제를 당국이 해결하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관료들을 매도하는 것은 참으로 기가 차고 어이없는 일이다.
경제는 흐름이 중요하다.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뒤틀어 놓았다가 나중에 아무리 벽력같은 호령을 내리며 바로 잡으려 해보았자 오직 공허할 뿐이다. 민자당이건 신민당이건 주요 경제관련공약을 시기·장소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바꾸어대는 일이 없도록 국민이 따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약속이 이행되도록 반드시 짚어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 경제는 한국만의 경제가 아니다. 국제경제의 틀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생활의 안정과 유권자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거짓 공약을 하고 맹맹한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을 기억해 두어야 하고 또 심판해야 한다.
그들에게 공약상습의원,실책자라는 꼬리를 붙여주자. 그런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에서 약속 불이행혐의로 「낙선」이라는 무거운 과태료를 물리자.
그것이 일부 정치인들의 공약남발 공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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