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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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산의 시에 『기민시』라는게 있다. 그가 곡산부사로 있을 때 지은 시다.
『상농군도 이제 거지가 되고/집집마다 문 두드려 구걸하니/가난한 집 구걸 갔다가는 되레 슬프고/부잣집에 구걸 가기 더욱 피하네…』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가까스로 추수를 맞으면 관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쳐 세미를 거두어가기 바빴다.
계판에 적힌 국납이외에도 신관사또 부임비는 물론 구관사또 귀향비,거기에 관아 수리비등 농민들이 물어야 하는 「세금」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상과 개혁의지에 불타는 36세의 젊은 목민관 다산은 아전들의 극악한 횡포를 뿌리뽑고 고질화된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고치려했으나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다산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자 반대파에서는 사형에 처하라는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바로 곡산부사시절의 선정이 인정되어 그는 유배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강진에 유배된 그는 다산 서옥에 칩거하며 두문불출,오로지 독서와 저술에만 전념했다.
그는 집권자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정열과 노력을 개혁과 실천의 학문인 실학의 완성에 쏟아 넣었다. 그는 유교경전을 고증하고 여기에 새로운 합리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실학을 학문적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이같은 저술생활 틈틈이 그는 이웃 농민들과 만나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또다시 농민의 참상을 눈여겨 보게되었다.
다산의 명저 『목민심서』는 곡산부사시절에 싹트기 시작하여 강진 유배시절에 완성을 본 것이다.
『…지금의 목민관들은 오직 사리를 취하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생각할 줄 모른다. 그렇게 되니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궁하며 병에 걸려 쓰러지는데 오직 목민관이란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살을 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목민심서』의 서문중 한 구절이다.
그가 「심서」라 한 것은 개혁의 의지는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었다.
6월은 「다산의 달」이다. 그것을 「개혁의 달」로 바꿔놓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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