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盧대통령이 진짜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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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가을 백악관을 찾았다. 공개행사 때다. 서울에서 온 전직 고위 공직자와 함께 둘러본 뒤 청와대와 비교해 봤다. 역사적 이미지.대통령 문화.예술성.국민과 거리감에서 다르다. 그런데 전체 크기에서 백악관이 청와대보다 훨씬 작다는 점이 새삼 신기했다. 백악관은 숙소.집무.행사.기자회견의 기능을 사실상 한군데에서 한다. 메인 빌딩과 별관(웨스트 윙.이스트 윙)이 복도로 연결돼 있다. 청와대는 나눠져 있다. 그리고 본관이나 영빈관만으로 덩치에서 백악관과 맞먹는다. 관저도 본관처럼 팔작(八作)지붕의 우람하고 기품있는 한옥이다. 경내 크기도 백악관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전직 공직자는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보다 세니 청와대가 큰 게 아니냐"고 농담 섞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자기 국민에 대해선 미국 대통령은 힘이 없다. 세금.교육.치안.주택의 국민생활은 주정부와 카운티가 맡고 있어서다. 연방대통령인 부시가 민생분야에 끼어들 공간은 좁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이 강력부 검사들을 청와대에서 만나 민생치안을 강조했다. 바람직하다. 문제는 대통령이 나서야 강남 집값이 잡히고 민생정책에 활기가 돈다는 점이다. 이라크 파병 문제부터 도둑 잡는 데까지 대통령의 소관이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의 국정장악 관행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이 넘치니까 임기시작 때 대통령은 나라를 뜯어 고치겠다는 의욕을 갖는다. 개혁을 내걸고 국정실험에 들어간다. 대통령은 국정 과외공부를 받는다. 전문화된 사회에서 짧은 임기 중에 그 효과를 보기가 어디 쉬운가. 총선.지방선거에서 표를 얻으려다 정책의 일관성을 잃는다. 개혁의 시행착오 속에 국민노릇 하기가 어려워진다.

사회의 전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니 대통령이 똑똑하면 국민도 똑똑해지고 대통령이 저질이면 국민도 저질이 되기 쉽다. 국민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뽑는다지만 국정 관리의 격조가 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이념적 질서와 역사관을 헝클어 놓는다. 김대중 정권의 친북 정책으로 나라가 많이 변했다. 막강한 단임 대통령제의 위력이다. 盧정권 주변 일부에서 문화혁명식 민중 정치의 야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패선거의 핵심 원인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정치인과 기업의 운명이 바뀐다. 그러니 선거자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고 기업인은 돈을 싸들고 다닌다. 주체할 수 없는 권력 탓에 부패가 스며든다. 국민통합도 어렵다. 내치는 국민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마련이다. 내치 권한까지 틀어쥐고 있으니 정책 혼선의 한복판에 대통령이 있기 쉽다. 대통령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 국정의 모든 사안을 챙기려 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 국정 경쟁력이 바닥을 헤맨다. 그러다가 평범하거나 실패한 대통령으로 물러난다. 과거 헌정사의 경험이다.

지금 같은 권력 운영으로는 盧대통령의 남은 4년도 과거의 전철을 밟기 쉽다. 그런데 개헌은 어렵다. 국회(3분의 2 찬성)와 국민투표(과반수 찬성)의 2단계 개헌 절차는 헌법에 손대지 말라는 뜻이다. 헌법에 담긴 내각제적 요소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게 권력분권이든, 책임총리제든 내치의 민생 분야는 내각이나 총리한테 맡겨야 한다. 미국처럼 대통령은 외교.국방에다 경제의 골격만 정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책임총리제는 盧대통령의 선거공약이다. 盧대통령의 결단이 있으면 가능하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권력 비만에서 벗어나 특정 분야의 국정에만 집중해야 한다. 盧대통령이 진짜 해야 할 개혁은 권력 분할의 결단이다.

(워싱턴에서)박보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