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길조 드디어 해냈다/이호철 소설가(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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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이 함께 외친 “코리아탁구”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낭자들,현정화,홍차옥,유순복,이분희는 7천만 온민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라예보 이후 18년만에 다시 세계정상을 탈취해냈다.
그리고 이번의 이 감격을 어찌 그때와 비기랴. 처음으로 성사된 남북 단일팀으로 이룩해낸 것이다.
그렇다. 남북의 장벽을 뚫어내는 것은 이렇듯 가장 자연스러운 분야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돼야 한다. 70년대초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상해방문을 뚫어냈던 길잡이역할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탁구였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그냥 탁구가 아니다. 온 세계의 이목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탁구의 정상을 가름하는 축제자리였던 것이다.
코리아 1위,중국 2위,프랑스 3위,헝가리 4위,『아리랑』곡조가 울려 퍼지고 하늘색의 삼천리지도가 그려진 깃발의 게양,시상대에 선 유순복선수의 눈에 어른거리는 눈물,재일동포들의 하나된 마음…. 그렇다! 이건 분명히 길조다. 길조임에 틀림없다. 지난번의 월드컵에서 서독이 우승하고 나서 불과 몇달 뒤에 독일이 통일되지 않던가. 그렇듯이,이번의 경우도 길조임에 틀림없다. 처음으로 성사된 남북 단일팀이 이룩해낸 결실인 것이다. 우리도 통일이 가까워 온다는 길조다.
바야흐로 여야 국회의원들은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IPU총회에 참석한 길에 각자의 신앙에 따라 성당에서,교회에서 미사와 예배를 올리고 광복사 절을 찾아가 예불을 올렸다. 그 자리에서 간간이 들렸다는 여신도들의 흐느낌소리….
바로 이렇게 평양의 문도열리기 시작하고 있고,김일성 유일신에 틈이나기 시작하고 있다.
작년 1년동안 판문점을 통해 합법적으로 남북을 오간 인원이 물경 4백87명이었다고 한다. 세차례나 열렸던 총리회담에서는 군사문제까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이렇게 남북의 물꼬는 터진 것이다.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을망정 이제 대세의 흐름은 정해졌다. 이 흐름을 누구를 막곤하고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흐름은 누군가의 자의적인 뜻에 의해 작위적으로 이러고저러고 해서는 안된다. 누가보더라도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라야 한다. 민족의 이익보다 저들 권력의 안위부터 계산한다면 그가 누구건 그 순간부터 그는 역적으로 전락한다. 이 세상에 절대란 없는 것이다. 민족을 위한 「절대적인 명제」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그때그때의 시시비비를 차근차근하게 가려 그때그때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폭포수로 떨어지고 막힌 곳에서는 차올랐다가 넘쳐나고 웅덩이와 흐름을 좇아 요리조리 물은 돌아서 흐르는 것이다. 개인의 운명 또한 그러하듯이 시운,나라의 운세도 매한가지다.
이번 강경대군 사건도 그렇다.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방안에 앉아서는 텔리비전 화면을 들여다보며 여자탁구로 감격의 눈물에 젖고,한발 밖으로 나오면 다시 최루탄 눈물로 범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삶인가.
한편으로 이런 것을 「호재」로 생각하는 사람들,혹은 「악재」로 생각하는 사람들,그렇게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행태는 또 무언가. 그러나 큰 테두리로 보면 그러저러한 행태들까지 몽땅 휩싸안으면서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이 나라의 운세이고 이 나라의 활력임에 틀림없다. 정치하는 사람들,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매일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아슬아슬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이 가는 길이 그렇듯이 나라가 가는 길도 가도가도 요철과 지그재그임에 틀림없다.
이번의 강군사건도 그런 춘사에 해당된다. 공안사범의 숫자로 보아 공안정국이란 말이 나올 법은 하지만 오늘의 남북상황의 깊은 맥락에서 본다면 북쪽으로 하여금 「남조선해방」이라는 진부한 꿈을 계속 이어가도록하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통일을 늦추는 길일 뿐이다.
새로운 진압법이 개발되어야 하듯이 새로운 시위문화도 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화염병과 최루탄의 무한 대치에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모든 어거지는 이제 설자리가 없다. 우선은 시시비비를 탁 털어놓고 철저히 가려야 한다. 그런 언로는 열려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상황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87년의 「6·10행진」때는 사흘간 연금 당했었고,「6·26행진」때는 최루탄속에서 눈물깨나 쏟았었지만 이번의 이 일에서는 그 어디에도 나갈 생각이 없다.
억울하게 죽은 강군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면서,한편으론 쇠고랑을 찬 이 나라의 꽃같은 젊은이들,의경들의 억울한 처지에도 따뜻한 연민을 보낸다.
그나저나 이런 난리법석속에서 날아온 남북단일팀 여자탁구의 세계정상정복 소식은 그 모든것을 아우르는 삼천리강산의 길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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